아인슈타인은 그 무엇도 자신의 상대성이론에 위배될 수 없다고 믿었다.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다. 정보는 물론 존재와 탄생 같은 ‘사실’조차 빛보다 빠를 수는 없다. 그래서 순간이동은 불가능하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전성기에 태동한 양자역학을 아인슈타인이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양자역학적 효과는 아인슈타인 이론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적으로 얽혀 있는 두 입자가 만약 존재한다면, 빛보다 빠른 이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이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를 수 없으므로 양자역학은 틀렸다’였다.
오늘날 ‘EPR 실험’으로 불리는 아인슈타인의 역설로 양자역학이 방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는 없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그로부터 순간이동을 구현할 기술적 힌트를 얻었다. 1990년대에는 아인슈타인의 역설에 기반한 원자 규모의 순간이동이 실험적으로 성공했고, 조만간 눈에 보이는 크기의 물질을 순간이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불가능이 오히려 가능의 씨앗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학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음 세대의 과학은 거의가 이전 세대의 과학이 ‘불가능’하다고 규정했던 영역에서 출현했다. 그래서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은 ‘과학발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불가능과 가능 사이의 유동적 관계로부터 자연스러운 철학적 의문이 싹튼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을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왜 불가능할까?”
물리학자 미치오 가쿠는 저서 <불가능은 없다>에서 우주의 현상적 불가능을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눈다. 첫째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고, 둘째는 이론적으로 가능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이며, 셋째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보수적인 분류다. 한때 ‘순간이동’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절망적인 불가능의 문제였지만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가능한’ 사건이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상상 가능한 것은 모두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논리적으로 명백히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을 입으로 말할 수는 있어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것,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 실현 가능한 것의 층위 구분은 부자연스럽고 자의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주가 논리의 지배를 받는 곳이라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이 존재하는 쪽이 더 단순명쾌하다. 인간의 과학과 법이 수많은 엄격한 금기를 설정해도 이 우주는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허락해왔다. 이유가 뭘까? 단지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