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통화를 시작함 속뜻 통화를 완성함
주석 반복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반복은 같은 행동을 거듭하는 것이지만, 이때 반복되는 행동은 처음 행동과 같은 의미를 띠지 않는다. 많은 이야기들은 구원이 반복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똑같이 따라하는 제스처를 통해서 죽음은 생명으로 전환된다. 눈이 멀어 물에 빠진 심 봉사를 대신해서 물에 뛰어든 심청이가 아버지 눈을 뜨게 했고, 거북이 등을 타고 죽으러 간 토끼가 거북이 등을 타고 사지에서 빠져나왔다. 감옥에 갇힌 춘향을 구원한 것은 변학도의 감옥행이고, 놀부는 흥부의 박 타기를 흉내내다가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
왜 그런가? 반복에서, 두 번째 행동은 첫 번째 행동에 상징적 의미만을 덧붙이는 일이다.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이때 덧붙는 것은 무(無)이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덧붙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정신분석가들은 거식증자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무(無)를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자가 먹는 일의 결여라면 후자는 먹지 않음을 먹는 일이다. 사실 영(zero)만큼 힘센 기호는 없다. 1 다음에 0이 하나 놓이면 10이 되고 둘이 놓이면 100이 된다. 0의 개수에 따라 1은 열배도 되고 백배도 되는 것이다. 반복은 바로 이 영을 덧붙이는 일이다. 동일한 말과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처음의 말과 행동이 구제되는 것이다.
말(스피치)도 그 안에 반복을 내장하고 있다. 내가 말을 바깥으로 내면, 그 말은 내 귀를 따라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으면 말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혼잣말에서는 저 반복이, 영의 되먹임이 계속된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 과정에서 0은 무한히 증폭되며, 이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혼잣말의 반복은 외로움의 반복이다. 되먹임을 중지시킬 사람이 없으므로, 외로움은 열배도 되고 백배도 된다.
전화를 할 때 “여보세요”를 반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저 말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 이미 전화를 받았으므로 상대가 전화기 저편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졌다. 하지만 저 말이 되울려 나와야 내 말이 온전히 자리를 잡는다. “여보세요”는 반드시 “여보세요”로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대화적 관계에 들어간다.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구원한다. 우리는 이제 외롭지 않다.
용례 나라 전체에 온갖 종류의 갑질 얘기가 나돈다. 우리가 이토록 천박해졌구나 하는 탄식을 멈출 수가 없다. 전화만 잘 받아도 이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