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작가이자 화가이자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이던 새비지 랜도어는 일본을 거쳐 조선을 방문하고 난 뒤 발표한 기행문에서 우리를 일컬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 칭한 바 있다. 그것이 1895년의 일이니 햇수로 120년 전의 일. 훗날 언제부터인가 우리 스스로 올림픽이니 월드컵이니 대대적인 국가 행사만 있다 하면 아나운서들이 마이크 들고 앵무새처럼 그 상투적인 표현을 반복해대기 일쑤였으니 아, 알다시피 하루라도 고요할 일 없는 이 나라에서 탓을 하자면 거스르고 거슬러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본 이탈리아의 그 학자부터 과녁 삼아야 할까.
괜한 억지임을 알면서도 서두가 길었던 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온갖 갑의 횡포를 보다 못해서다. 비행기에서 황당무계한 갑질을 자행한 대기업 총수의 딸이 구속된 이후 이런저런 ‘사건’이란 이름을 단 다양한 갑질의 사례가 쏟아져나오고 있는 바, 전 국민의 호들갑에 살짝 어깃장을 놓자면 뭐 사실 이게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지 않았던가.
새해맞이 서랍정리를 하다가 그간 출간했던 내 책들의 계약서가 든 파일을 넘겨보게 되었다. 출판사와 내가 갑과 을이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갑과 을이란 말을 편의상이라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맘껏 용인해주었을까.
처음으로 내가 이 사회의 을이구나 깨달은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한 대형마트에서 주말마다 음료 시음과 시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거스름돈이 필요해 15분 정도 자리를 비운사이 한 손님이 다녀갔는데 그가 판매요원이 없어 불편했다는 얘기를 마트쪽에 신경질적으로 내비쳤고, 마트쪽은 아르바이트 주선 업체에 항의를 했고, 결국 나는 그 손님에게 머리 숙여 죄송합니다, 소리를 그가 음료 한 박스를 받아들고 돌아설 때까지 반복해야 했다. 일당 5만원, 한달을 꼬박 채우면 만질 수 있는 40만원이라는 큰 돈 앞에서 죄도 없이 잘못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20년이 지난 일임에도 그날 그 손님의 얼굴과 옷차림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내가 겪은 감정이 모멸감이었기 때문일 거다.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 모멸감. 내 존재 가치를 격하시킨 건 그러나 그 손님이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기에 나는 통장을 엄마에게 선뜻 내미는 일로 돈의 귀함을 배웠고 새 통장을 개설함과 동시에 돈의 허기를 느꼈다. 우리 사회에서 무시당한 상처로 응어리진 을들이 어릴 적부터 돈타령을 해대는 이유, 이 나라의 못된 풍토를 배제하고서 말이 될까.
대기업의 횡포를 대기업이 만든 휴대폰으로 때려잡을 수 있게 된 아이러니를 고소해하다가 문득 씁쓸함에 입맛을 다셨다. 영상이든 문서든 온갖 증거자료를 내밀어도 나 아니다 발뺌에 바쁜 청와대, 우리 국민 모두의 을이 되어야 마땅할 그 자리에서 최고의 갑질이 자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힘없는 백성이라 읊조려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