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내 자식이 아니라는 뜻 속뜻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
주석 철들기 전에 한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하는 말, “어렸을 때, 널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우리를 단번에 홍길동이나 신데렐라로 만드는 그 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그 말. 계모와 이복누이들 사이에서 하염없이 설거지나 하는 게 나의 운명이라는 걸 깨닫게 한 그 말. 아버지는 왜 저토록 잔인한 진실을 폭로할까. 우리가 가출할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철이 든 후에야 우리는 저 말이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놀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저 다리는 마포대교나 영도다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다리를 말하는 것이었지. 어째서 “다리 아래서”라고 하지 않고 “다리 밑에서”라고 말했는지도 그제야 알게 된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왜 저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여러 번 반복할까. 웃기도 어렵고 울기도 어려운 농담을.
프로이트는 문명의 기원에는 잔인한 아버지가 있다고 상상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여자들을 독점하고 아들들을 추방했다. 성장한 아들들이 돌아와 힘을 합쳐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의식과 자신도 자식들에게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 아들들은 협약을 맺었다. 아버지가 차지했던 여자들(어머니와 누이들)은 단념하자고. 프로이트는 이것이 근친상간 금지이며, 바로 여기서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태초의 아버지는 잔인하면서도 외설적이다. 아들들에게는 금지명령을 내려놓고 정작 자신은 여자들을 독차지했다. 아버지 자신에게는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가 없다.
이 금기가 내면화된 것이 우리 마음속의 아버지, 초자아다. 초자아는 금지명령이지만, 바로 그 금지의 형식으로 유혹을 재도입한다.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자아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기에, 초자아의 금지명령은 위반에 대한 강력한 유혹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데려간 저 “다리 밑”을 생각해보자. 저 장소는 나의 기원이다. 출산 장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외설적인 장면을 응시하라고 내게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철이 들었으므로 우리는 이 징그러운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 초자아에게, 내면화된 법에 선언해야 한다. 너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용례 국부(國父) 이승만은 6•25가 터지자, 대전까지 도망가서(대구까지 달아났다가 너무 멀리 갔다는 지적에 조금 용기를 내서 돌아왔다)는 전화로 녹음한 방송을 내보냈다. 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여 북상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그러고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다리를 건너던 수백명의 피난민이 폭사했다. 우리는 그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끔찍하게 외설적이다. 우리는 다리 밑에서 주운 사람들이었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게 아니다. 실은 아버지 아닌 자를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