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26살이던 2011년에 쓴 책으로, “요즘 젊은 것들” 운운하며 혀를 차는 기성세대에게 조목조목 따져묻는다. 첫 번째 질문은 청년•젊은이라는 말의 개념이다. 청년에 대한 일반화란 가능한 일인가?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버리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발칙하다’라는 식으로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지적은, 이미 젊은이가 아닌 중•장년층의 ‘자기긍정’이자 ‘자아찾기’의 일종이라는 게 후루이치의 설명인데, 흥미로운 점은 결국 일본 인구 모두가 연령대와 무관하게 모두 젊은이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육체의 나이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의 대상이자 사회가 필요로 하는 타자화된 노동력으로서의 이등시민인가의 여부다.
현재 일본의 젊은이들은 왜 높은 비율로 행복하다고 느낄까? 값싼 물자가 넘쳐나는 시대, 단번에 쉽게 가려낼 수 있는 빈곤자는 눈에 띄지 않고, 애인•친구•동료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관계가 주는 승인의 감정은 ‘소소한 유명인 양성소’인 인터넷을 통하면 된다. 그 사실을, 지금의 20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게 후루이치의 설명.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이 현상이 말하는 젊은이 세대는 점점 여러 연령대로 넓어질 것이다.
후루이치는 청년 운운하며 편리한 대로 이용하려고 하는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23살 때 <태양의 계절>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태양족이라고 불리며 기성세대의 비난을 샀으나 이제 팔순의 나이에 극우 정치인이 되어 청년을 꾸짖는 상황에 대한 설명 뒤에는 이런 말을 더한다. “1955년 당시에, 이 사회가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줬었는지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렇겠지, 잊었겠지.” 그러니 다른 말로 하면,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속내를 약간은 읽을 수 있다.
ps. 이 책의 미주는 엔하위키 미러 같은 (유저들이 작성한 항목과 주석들이 권위적이지 않은) 인터넷 사이트들처럼 그 자체로 읽어볼 만한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