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다녀왔다. 보건복지부가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치유센터를 건립했는데 그곳에서 주최한 인문학 콘서트에서 민망한 ‘저자와의 대화’를 했다. 원래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강사료와 지역부터 확인하지만 이번 안산 강의는 강사료도 묻지 않고 무조건 한다고 했다. 의식했든 안 했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죄의식과 부채감을 덜고 싶었다. 나도 세월호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는 자기위안이 필요했다. 두 번째는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말할 것도 없이, 두 가지 모두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강의가 끝나자 어떤 시민이 말했다. “사고 이후 안산 시내에는 두 가지 플래카드가 넘쳐났어요. 하나는 잊지 않겠다, 행동하겠다 그런 거였고 또 하나는 온갖 강연 소개였어요. 평소에는 ‘인(in)서울’에서만 들을 수 있는 유명한 분들이 우르르 몰려온 거예요. 예전에는 안 오시던 분들이…. 특강 오는 분들은 이렇게 한번 다녀가고 나면 면죄부를 얻어가는 게 아닌가요? 남겨진 우리의 상실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서 내가 “저도 나름대로 고통이 있어요”, “안 오는 거보다는 낫잖아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죄송합니다”도 적절치 않다. 위로랍시고 준비해간 말이 있긴 했다. 나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좋아한다. 상실과 이별은 인생의 필연. 이렇게 생각하면 덜 고통스럽다. “지금 고통은 그때 행복의 일부”라는 영화 <섀도우랜드>의 대사도 좋아한다. 나를 지탱해온 말이지만 그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안산시 중앙역에 내리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많았다. 진상규명이 안 된 상태에서 슬픔은 유예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회자정리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겠는가. “아이들과 좋았던 시간을 생각하세요”는 더욱 황당하다. 아이들은 그들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인 것을.
무기력과 당황스러움, 추위까지…. 내가 여길 왜 왔을까. 문자 그대로 내 몸을 둘 곳은 없었다. 나를 포함하여 대개의 사람들은 위로할 마음가짐, 이에 따르는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게다가 나를 포함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위로는 가장 어려운 인간사 중 하나다. 요즘 세상엔 더욱 그렇다. 인간은 섬이다. 아무리 섬 아래가 연결되어 있다 해도 현실은 섬이다. 몸이 분리된 우리는 각자의 몸에서 자기만의 전쟁을 치른다. 그러므로 최고의 위로는 상대방의 섬으로 이사가는 것,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존재의 이전이다.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을 알지만 시작하는 일이 있다”. 위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