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마드 기름을 발라 쫙 올려붙인 머리에 새빨간 가죽 재킷, 청춘의 상징인 청바지에 매서운 눈빛까지. <국제시장>에서 오달수가 제임스 딘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장면에선 그 상상하지 못한 자태에 객석에서 폭소와 경탄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아이디어에서 태어난 컨셉으로 오달수가 연기한 달구 캐릭터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덕수(황정민)의 죽마고우 달구는 나름 1960년대 국제시장의 얼리어댑터이자 이슈메이커다. 누구보다 빠르게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나타난 달구는 시사에 밝고 유행에 민감한 영화광. 단박에 눈길을 끄는 주인공 덕수의 곁에서 달구는 당대의 문화적 코드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은근하게 시대상의 변화를 드러낸다. “강력한 개인사를 가진 덕수와 달리 달구는 말랑말랑하게 완급 조절을 하고 있죠. 덕수가 굵직한 드라마를 끌어간다면 달구는 외관을 통해 그때의 공기를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파독 광부 일을 제안하는 등 달구는 덕수에게 매번 새로운 소식을 물어다주며 극의 흐름을 이끄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독일에서도, 베트남에서도, 부산 국제시장에서도 덕수와 달구는 형제처럼 붙어다닌다. “달구는 덕수의 인생을 자꾸 변화시키는 사람이에요. 드라마를 만들어낸달까. 갱도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보통은 먼저 가라고 하는데 달구는 나 두고 가지 말라고 하잖아요. 달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영화는 끝났겠죠.” 실제로도 오달수는 덕수를 연기한 황정민과 <마지막 늑대>(2004), <그림자 살인>(2014)에 이어 <국제시장>에서 세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주관이 확실하다”며, 오달수는 “볼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이라고 황정민을 평했다. 가까운 사람임에도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양이 퍽 조심스러웠다.
“달수씨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다. 달구 역을 해주면 좋겠다”는 윤제균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오달수는 <국제시장>에 곧바로 합류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지는 건지.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그렇게 나더라고요.” 가족에 대한 추억과 함께 옛 시절을 환기시키는 드라마에 마음이 쓰인 것 같다. “술을 자주 한다는 기사를 보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신다”는 얘기만 들어도 아버지가 별세한 뒤 홀로 되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뚝뚝 묻어나온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땐 어떻게 지내왔나 싶을 정도죠. 식구들끼리 한방에서 다 같이 잠자는 걸 당연한 걸로 알던 때가 있었거든요. 모두가 그랬어요. 다들 그렇게 소박하고 착했던 때가 있었죠.”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경하게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국제시장>이 품고 있는 커다란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흥미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당대를 살진 않았어도 “배워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우리의 역사”라는 점에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진 않았다고 한다.
“유일하게 내키지 않았던 점”이라면 “숨막히는 탄광에 두 시간 넘게 머물러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해외 로케이션을 다니며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 유머를 심기 위한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들이었다. 그간 오달수가 연기해온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예상외지만 오달수는 “밝히는 대사”가 조금 어색하다고 했다. <국제시장>에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발육상태”라거나 “백마”를 만나는 것이 꿈이라는 대사들이 그랬다. “어떡하면 최대한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 대사들은 솔직히 좀… 거부감이 있었죠. (웃음) 베트남의 어린 여자와 결혼해 국내 최초의 베트남 국제결혼 기사가 실린다든가 하는 것들도요.” 내키지 않았다기보다 험난했다는 말이 어울릴 장면도 있다. 베트남에 파견간 달구의 어깨에 뱀이 슬슬 내려온다. “직접 안 겪어보면 몰라요. 뱀이 어깨를 타는데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어우… 미치겠더라고. 오케이가 안 났는데도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는데, 윤제균 감독님이 딱 한번만 더 해보자고 하셔서 죽기 살기로 임했어요. 다행히 그땐 오케이가 났죠.”
독일에 파견된 달구가 독일인 여자 사감에게 구애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 중의 압권. 달구는 현란한 손목 스냅과 발재간을 이용해 약간은 촐싹 맞고 조금은 세련된 몸동작으로 트위스트를 춘다. 심지어 회장 한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감의 코앞까지 달려가 무릎을 꿇고 마음을 전하기까지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시간날 때마다 단체로 트위스트를 배웠다는 솜씨치고는 너무 잘한다. “사실 예전에 2인극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을 할 때 춤을 춘 적이 있어요. 일본인 배우와 둘이서 해야 했는데 말이 통해야지. 그래서 안무를 길게 만들었는데 거기서 몇개 동작을 뽑아왔어요. 연기 배울 때 신체훈련을 많이 하니까 거기서 차용한 것도 꽤 되고요. 당시 사람치고는 몸동작이 너무 요즘 사람 같지 않은가 했는데 볼거리를 얻고자 그대로 갔죠. 재밌는 장면이지만 그 장면의 가장 굵은 가지는 파독 광부들이 이렇게라도 숨 돌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거였어요. 어쩐지 비애가 느껴지죠.”
누군가의 비애에 오달수가 이토록 서글픔을 느끼는 건 오랜 연극 활동을 통해 많은 고락을 겪어왔기 때문일 거다. 언젠가 오달수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십대 시절을 고스란히 연극에 바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엔 당장의 미래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어느덧 연기자가 된 지 25년이란 세월이 갔다.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대표로 있는 지금도 오달수는 자신의 정체성은 연극배우라고 단언한다. 지난 5월에도 연극 <템페스트>에 배우로 참여했다. “매번 제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면서 계속 후회해요. 아쉬운 게 너무 많죠. 저도 그렇지만 우리 극단의 후배들도 작품을 통해 자꾸 겪어서 스스로 배웠으면 해요. 그래서 극단 후배들이 올리는 공연에 아쉬운 점이 보여도 간섭하지 않아요. 직접 느껴서 자기 살로 만들어야죠.”
쉬지 않고 일해온 때문인지 오달수도 요사이 부쩍 피로감을 느낀단다. 한때 애주가로 이름도 날렸으나 “주량으로 오랫동안 공력을 쌓고 나니 요즘은 그저 즐기는 경지”로 만족하고 있을 정도라고. 현재 촬영 중인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끝내고나면 일주일만이라도 푹 쉬고 싶다고 한다. <암살>을 마치고 나면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석민우 감독의 데뷔작에 참여할 예정이다. 한창 개발 중인 작품이니 윤곽은 조금 시간이 지나야 드러날 것 같다. 하지만 관객은 새해에 연이어 개봉할 영화들로 또 한참 오달수를 만나게 될 거다. “말도 안 되게 날아다닌다”는 유쾌한 조선 어드벤처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로 시작해 황정민과 “일종의 전우”로 만나 네 번째로 완벽한 호흡을 과시할 <베테랑>, 하정우와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을 거라는 <암살>이 기다리고 있다.
Magic hour
천만영화 전문배우
오달수는 숨겨진 흥행 메이커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영화 중 무려 네편에 이름을 올려 천만영화 최다 출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괴물>에선 괴물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고, <도둑들>에선 “도둑들이랑 일하려니까 불안불안”하다는 괴상한 중국 도둑 앤드류로 출연했다. <7번방의 선물>에선 교도소 안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지만 기역자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조폭 소양호를 연기했다. <변호인>에선 송우석(송강호)의 사무실 사무장 동호가 되어 든든한 조력자 포지션을 떠안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최근 개봉한 <국제시장>이 대략 관객수 650만명을 넘기면 오달수는 국내 최초로 1억 관객을 불러모은 배우에 등극한다는 것. 12월25일 크리스마스 스코어, 285만명으로 목표지점까지 순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