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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자유롭게, 거침없이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4-12-29

<상의원> 고수

“맞다”고, “그렇다”고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부터 쳐주는 남자. 더 많이 말하기보다 더 오래 듣는 쪽에 서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고수다. 배우로서 고수가 걸어온 길도 그와 똑 닮았다. 소란스럽지 않게 작품에 임하면서 쉼 없이 꾸준히 자신의 보폭을 유지해왔다. 속독으로 더 많은 걸 탐하는 다독가보다는 마음에 드는 책 하나를 오래도록 정독하는 애서가와 같은 배우. 그런 그가 이번에 꺼내든 작품은 <상의원>이다. 그가 맡은 이공진은 조선에서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모든 수식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이다. 얼핏 보면 공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말하는 호방한 남정네 같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진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세우는 사람도 없다. 그러고 보니 고수와 공진, 둘 사이에 묘한 교집합이 그려진다. 그럴듯한 조합이다.

우당탕탕. 웬 날짐승 같은 사내가 지체 높은 양반들이 모여 있는 술자리로 겁 없이 뛰어든다. 예의니 법도니 운운하기 좋아하는 양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사내 때문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방정맞은 이 사내,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천재 디자이너로 불리는 <상의원>의 이공진이다. 첫 등장부터 시선을 확 잡아끄는 공진을 다시 보게 만드는 건 순전히 고수 때문이다. 그의 반듯반듯한 이목구비, 흐트러짐 없는 분위기에서 이런 분방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의원> 바로 직전의 그의 출연작은 드라마 <황금의 제국>. 당시 그는 모든 선택도 모든 결정도 자신이 내리겠다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야망가 장태주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봐도 크게 다르진 않다. 공진처럼 왁자지껄하게 영화의 포문을 열어젖히는 경우보다는 그보다 훨씬 낮은 데시벨로 극의 중심을 잡아가는 고수가 먼저 떠오른다. 어딘가 헐렁해 보이는 공진을 능청스레 걸치고 나타난 고수가 생경하다.

“과거가 없는 남자.” 이 말로 고수는 공진을 설명해나갔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 같은 사람. 그저 좋아하는 일인 옷 만들기를 하면서 이 세상 한번 시원하게 놀다가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과거가 없다는 건 얽매일 게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수는 공진을 설명하는 내내 “자유롭다”는 말을 하이쿠처럼 붙였다. “<상의원>의 인물들은 신분이니 지위니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를 나누려든다. (왕실의 의복 제작을 전담하던) 상의원의 어침장 조돌석(한석규)도 그렇잖나. 능력도 있고 많은 걸 가진 사람인데도 공진의 재능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어디 돌석뿐인가. <상의원>에는 선왕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뒤틀린 왕(유연석)과 그런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해 갈 곳을 모르는 왕비(박신혜)까지 인정투쟁의 패배자들이 모여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공진은 다르다. 누구를 시기하지도 않고 궐 안의 권력 싸움에도 전혀 욕심이 없다.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이상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공진이 그렇게 ‘다를’ 수 있었던 건 <상의원)에서 공진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 공진이다. 당시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획기적인 의상을 내놓는 재능을 소유했지만 “수 하면 어침장님 아닙니까”라며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단박에 인정해버리는 호인. 그만큼 단순 명쾌한 공진이 고수를 <상의원>으로 빠져들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상의원>이) 고수의 첫 사극 도전작이다’, ‘공진 같은 통통 튀는 역할이 고수에게 의외다’라는 세간의 반응에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껍데기가 어떻다고 말하는 건 밖에서 보는 이들의 이야기다. 매력적인 인물인 공진에게 집중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게 됐을 뿐”이라며 그는 인물의 내면을 거듭 들여다봐주길 바란다.

늘 그래왔듯 고수는 이번에도 꼼꼼하게 시나리오를 분석했다. “내가 해야 할 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캐릭터를 탄탄하게 구축한 뒤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답다. 그만큼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그에게 얼마간의 긴장과 그보다 몇곱의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다. “늘 조심스럽다. 뭔가 확신을 가지고 연기에 임해야 하니까.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는 늘 고민하고 주저한다. 이게 맞을까? 이렇게 하면 좋을까?” 그런 그가 이번엔 힘을 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카메라 앞에서 좀더 노시라”는 이원석 감독의 주문이 컸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음해하려 한다고 하자. 사람이라면 응당 자연스레 나오는 리액션이 있을 것이다. 그런 리액션을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였을 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시더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웃음) 감독님은 공진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길 원했고 (리액션도) 다르게 표현하길 바라셨다. 인위적으로 뭘 더 하려고 하지 말고 편안해지라고 하는데 그게 참 고민이었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달라진 상황을 인정해가는 건 고수나 공진이나 비슷했던 걸까. “매 작품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다르니 작업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면서 서로 알아가고 소통해간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독과 더 자주 이야기했고 더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공진을 만들어갔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이후 매년 영화 한편씩은 꼭 내놓았던 부지런한 고수이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은 쉬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자신의 연기는 “과정 속에 있다”고,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좀더 치열해지고 싶다”고 콕콕 짚어 말한다. 오죽하면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이제 시작이다’라는 문구를 매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자신과의 조우를 기대할까. “관객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되는 게 내 목표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연기에 욕심을 부려본다.” <상의원>(개봉 12월24일)에 앞서 강제규 감독의 단편 <민우씨 오는 날>(개봉 12월18일)까지 개봉하며 올해를 꽉꽉 채운 그의 내년은 어떻게 시작될지. “왕비와 공진의 주고받는 멜로가 아니어서 이번에 상당히 아쉬웠다. (하하) 요즘 들어 멜로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기분 좋게 한다는 건 굉장히 소중한 감정 아닌가. 기회가 된다면 멜로를 해보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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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인트렌드 권혜미 실장·헤어 아우라 임철우 원장·메이크업 고원 문혜은·의상협찬 구찌, 디오르, 돌체앤가바나, 닐바렛, 톰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