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국민배우’의 초상

최은희

배우에 대한 최고의 호칭 가운데 하나가 ‘국민배우’다.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이자, 국민을 상징하는 배우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국민의 동일시 대상이다. 그 배우가 우리 같고, 더 나아가 국가의 정체성까지 표상하고 있어서다. 해방 이후 한국인의 동일시의 대상이자, 한국의 국가 정체성까지 표상한 국민배우를 꼽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가 최은희다.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은 차치하고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의 주인공인 게 첫째 이유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당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성춘향>은 서울에서만 36만 관객을 동원했다. 흔히 그 숫자는 요즘의 ‘천만 관객’과 비교된다. 말하자면 최은희는 지금도 어려운, 여성주인공 흥행대작의 첫 스타다. 한국의 관객은 <성춘향>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더 나아가 한국의 정체성까지 보았다. <성춘향>은 국민배우 탄생의 서곡인 셈이다.

<성춘향>, 국민배우 탄생의 서곡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대개 춘향처럼 사회적 약자다. 세속적 권력 혹은 능력에선 내놓을 게 없는 인물이다. 그가 주인공인 이유는 오직 고귀한 윤리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멜로드라마적 상상력>, 피터 브룩스 지음). 춘향은 태생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집안의 딸이다. 그것도 서러울 수 있는데, 사랑하는 남자 몽룡(김진규)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매를 맞는다. 양심을 지켰더니 죽을지도 모를 벌이 뒤따른 것이다. 멜로드라마가 심장이 뛰는 매력을 선사하는 것은 이렇듯 허구가 현실을 압도할 때다. 예나 지금이나 타락한 권력은 신분이 낮은 사람 앞에서 기고만장하다.

사또 변학도의 유명한 대사, 곧 “수청 들라”는 부당한 명령에, 춘향/최은희는 “유부녀를 강간하는 죄”를 상기시킨다. 그 표정이 어떻게나 실감나는지 당시 악인 전문 배우였던 이예춘의 기가 수그러들 정도다. 춘향이 죄목에 일심(一心, 곧 몽룡에 대한 단 하나의 사랑)이라고 서명을 하며, 붓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때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일심, 곧 윤리를 방어할수록 처벌은 가혹해진다. 아마 많은 관객은 최은희가 여기서 매를 맞으며 한이 맺힌 듯 통곡할 때, 같이 울었을 것 같다. 권력은 비겁하게 여성의 사랑마저 제멋대로 뺏으려 들고,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는 춘향은 잔인하게 매를 맞는데, 그건 남녀를 떠나 관객 대다수의 벼랑 끝 삶과 다를 바 없(었)다.

희생하는 최은희의 정체성은 <성춘향>을 통해 한국인 정체성의 은유가 됐다. 권력에 휘둘리는 춘향처럼 한국인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볼품없는 집안의 자식 같았다. 그러나 맑은 영혼은 고귀했고, 그것을 지키려다 대가를 치르는 수난은 신상옥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 연속하여 반복된다. 가족을 위해 개인의 사랑을 포기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여성에게 부과된 가부장 윤리에 희생되는 <열녀문>(1962), 가난 때문에 팔려온 신부가 되는 <벙어리 삼룡>(1964) 등은 모두 최은희의 대표작이자 당대 한국인의 초상화였다.

하지만 최은희가 전통적인 여성상뿐 아니라 이색적인 역할도 잘 소화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 ‘팜므파탈’의 시조격인 <지옥화>(1958)에서의 양공주 소냐, 호러인 <백사부인>(1960)의 뱀 같은 마녀, 유흥업소 여성인 <로맨스 그레이>(1963)의 만자 등은 전통적인 여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최은희의 모습을 선보인다. 모두 신상옥 감독의 작품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이 이런 최은희의 모습은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객은 최은희가 특히 김진규와 짝을 이뤄, 전통적인 여인으로 나오는 걸 더 좋아했다. 최은희는 김진규 옆에 있을 때 가장 빛났다.

신상옥 감독과 만든 보석들

최은희는 경기도 광주에서 1928년(자서전에선 1930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전화국 공무원이었다. 스타들이 대개 그렇듯, 10대 때 연극을 보고, 배우가 되고 싶어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극단에 가입할 정도로 예술적 열정이 대단했다. 부친은 딸의 예인 생활을 반대했지만, 자신이 한때 연극을 했으니, 최은희는 부친의 열정을 닮은 셈이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에 데뷔했고, 영화는 <새로운 맹서>(신경균 감독, 1947)로 데뷔했다.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마음의 고향>(윤용규 감독, 1949)에서 미망인 역으로 나온 뒤부터다. 전통적인 어머니 이미지, 한복이 제격인 맵시는 이 영화를 통해 알려진다(한국영상자료원의 VOD로 볼 수 있다).

막 인기를 끌 때, 전쟁이 났고, 그 전쟁 기간 중 평생의 상처가 되는 수치를 겪는다. 휴전 뒤, 시중에는 ‘최은희가 여러 인민군에게 폭행당했다’는 잔인한 소문이 나돌았다.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에 따르면, 한국의 스타를 욕보인 장본인은 인민군도 미군도 아닌 한국군 장교였다. <성춘향>의 “유부녀 강간”의 대사가 그렇게 절절했던 건 현실이 허구에 들어왔기 때문일 터다. 스타에겐 자의든 타의든 역사의 흔적이 기록되기 마련인데, 전쟁의 잔인함은 그대로 최은희의 삶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 최은희는 평생의 동료이자 감독인 신상옥과 결혼한다. 신 감독은 최은희가 입은 상처를 다 알고 있었다. 최은희가 신상옥의 사랑 앞에서 마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주인공처럼 주저하자, 청년은 이렇게 청혼한다. “은희씨가 어여쁘지만 그걸 넘어선 무언가가 있소. 힘들었던 시절이 없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깊은 무언가가. 내가 사랑하는 건 바로 그런 은희씨요.”(<최은희의 고백>) 대장부 신상옥과 국민배우 최은희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들 부부의 첫 화제작은 <젊은 그들>(1955)이었고, 그 이후의 대부분 작품들이 한국 영화사의 보석이 됐다.

스타의 삶에 역사가 침투하는 또 다른 일은 그 유명한 납북사건이다. 1978년 홍콩에서 최은희는 납북됐고, 곧바로 남편인 신상옥도 납북됐다. 이후 부부는 9년간 북한에서 살며, 영화인으로 활동했고, 1986년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하지만 탈출 뒤에도 조국에 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건, 곧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의 부조리가 운명처럼 스타의 삶에 기록된 것이다.

최은희는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신상옥 감독, 1985)으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최은희는 북한에서도 영화사의 한 부분을 기록했다. 한국의 스타로는 유일한 경우다. 우리는 최은희를 보며 한(恨) 많은 한국인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먼 훗날 정치가 안정되면, 북한에서도 그를 국민배우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