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으면 어떤 점이 좋나요?” 그런 질문을 받곤 한다. “대단한 도움이 되면 제가 이렇게 살겠어요?” 그렇게 대답하곤 한다. 농담이 아니다. 혹시나 하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닌데, 아무래도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나와 비슷한 환자를 만나면 물개박수를 치며 신나한다. 혼자 망하는 것보다 누가 같이 망하는 게 마음에 위안이 되잖아?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의 데이비드 실즈는 그중 하나인데,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는 바로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지혜는 없다. 많은 지혜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답고 망상적인.” 이 대목에서 맨 뒤의 ‘아름답고 망상적인’의 반짝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설읽기만 한 시간낭비는 또 없다. 그런데 데이비드 실즈의 이 책이 특별한 점은, 그가 삶을 맹렬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 가상의 세계로 도망쳐 지내기 위해 소설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는 만큼 소설 밖의 세상에서 해서 좋은 것, 안 해도 되는 것, 하지 않는 게 좋은 것 등을 열심히 하며 산다. 무엇보다 참 섹스에 열심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마 책에 대한 책, 문학에 대한 책에 관한 선입견이 이보다 더 산산조각나기도 힘들지 않나 싶다. 2장 ‘사랑은 오랫동안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그런 면에서 굉장하다. 사랑을 곧잘 오류를 저지르는 신들을 섬기는 종교로 묘사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하는 이 장에는 ‘내 인생에서 성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했던 경험’이 제법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 이 경험담은 다음 순간 행복한 순간들이 “여기야, 바로 지금이야, 근사해. 계속 이대로 있자”고 생각하는/말하는 순간 낙원을 망치는 우를 범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문장들로 마무리된다(그 끝내주는 섹스의 주인공이 가장 행복을 안긴 사람은 아니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사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는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이 너무 많이 거론된다. ‘모든 훌륭한 책은 결국 작가의 이가 깨지는 것으로 끝난다’는 제목이 달린, 그가 온마음으로 믿는 55편의 작품을 소개하는 장에서 거론되는 첫 소설은 레나타 애들러의 <쾌속정>이며, 존 베리먼의 <꿈의 노래>, 그레구아르 부이예의 <수수께끼의 손님> 같은 책들이 <플로베르의 앵무새> <연인> <수상록> 같은 책들과 나란히 실려 있다. 아는 척을 하고 싶어도 구경해본 적 없는 책이 너무 많은데, 데이비드 실즈는 그 무시무시할 정도로 아득히 높아 보이는 책 제목들 사이로 유혹적인 오솔길을 여럿 뚫어놓았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면서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을 이미 근사하게 실현한 인간이 여기 하나 있는 것이다. 책 제목에서 구원을 기대했다면, 그 구원은 좌절될 것이며 또한 근사하게 응답받을 것이다. 글읽기에 미친 인간들만 아는 그런 천국/지옥이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