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서민을 가장 잘 챙기는, 그리고 누구보다 인권과 행복추구권을 지키려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던 그가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이 포함된 인권헌장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이에 격분한 성소수자들과 인권단체들이 시청을 점거하고 나섰는데, 박원순 시장은 이들의 시위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전혀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박원순 지지자들은 특히 놀랐을 것이다. 결국 그도 시민들의 인권보다는 개인적인 출세를 노리는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는 것에 놀랐다기보다는, 그런 뻔한 패턴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여당이 새누리당, 야당이 새정치민주연합인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줄 정치인이 누가 있냔 말이다. 깨시민들이여,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야당이 새정치민주연합이다.
60년대, 언더그라운드에서 태동한 젠더영화
알다시피, 섹스와 젠더는 다르다. 섹스는 선천적으로 태어난 성이고 젠더는 후천적으로 선택된 성이다. 두 단어가 공존하는 것처럼 섹스는 언제든지 젠더로 바뀔 수 있다는 전제가 성정치의 시발점이다. 젠더는 언제나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 이유는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나 젠더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소수지만 평등하듯, 젠더도 소수지만 평등하다. 그리고 그 평등은 정치적으로 보장받아야 하고, 보장받지 못했을 때는 쟁취해야 한다.
영화도 섹스영화가 있고, 젠더영화가 있다. 섹스영화는 성의 포르노적인 속성 -꼴림과 사정의 무한반복- 을 매개로 한 영화들이다. 성을 다루면서 성정체성(sexuality)을 고정화하는 모든 작품은 엄격한 의미에서 섹스영화에 해당한다. 물론 성정체성의 비고정성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괘씸한 작품들도 모두 섹스영화로 분류되어야 하겠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다(<바운드>처럼 섹스와 젠더를 영민하게 가로 지르는 작품도 있다. 워쇼스키 남매 만세). 반면 젠더영화는 성정체성을 모험하는, 그야말로 고정성을 의심하고 탐구하고 해체하고 심지어는 무지개 빛깔로 칠해버리는 모든 작품이다. 물론 엄격하지 않은 의미에서다(<바운드>는 개인적으로 젠더영화라고 생각한다. 워쇼스키 남매 만만세).
젠더영화의 시발점은 1960년대다. 2차대전의 종전 이후, 허무주의와 개혁의 기운들이 동시에 꿈틀거리던 혼란스러운 시대에, 성소수자들도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트 운동의 중심지였던 미국에서조차 젠더영화의 출현은 쉽지 않았다. 래리 플린트의 <허슬러> 사건이나 린다 러브레이스의 <딥 스로트> 사건처럼 노출의 외연을 합의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은 요원해 보였다. 게다가 미국의 60∼70년대는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 무비의 시대 아니던가? 러스 메이어와 잭 힐이 들고 나온 섹스영화들이(물론 잭 힐의 후반기 영화들은 젠더영화에 가깝지만) 간지나게 터지고 있던 때였다. 블랙플로이테이션(blackploitaion) 무비에서 모피코트를 입은 흑형들이 백인 여자를 끼고 샷건을 쏴대는 전복적인 비주얼을 볼 수 있을지언정, 게이-레즈비언들은 여전히 오버그라운드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영화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만들어진다. 케네스 앵거와 잭 스미스가 16mm에 담아낸 광기 어리고 쾌활하고 동시에 전복적인 이미지는 러브레이스가 정액을 먹었냐 말았느냐의 전국적 논쟁은 아니지만, FBI와 검열기관을 당혹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스콜피오 라이징>에서 보여준 동성애자들의 전복적인 비주얼 -무리지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술을 먹고 여자를 희롱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치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은 영화에서도 성정치가 쟁투되어야 한다는 훌륭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불타는 피조물들>은 그 악명 높은 게이-레즈비언-이성애자-동물-뱀파이어-요정-신(!) 들의 집단 난교 장면으로 법원으로부터 상영 불가 판결을 받아 성정치의 최전방 공격대가 되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보면 이 영화는 하나도 안 야한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디서 남은 필름을 주워다 썼는지 필름 상태가 너무 불량해 어디가 젖가슴이고 어디가 고추인지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반자본주의 젠더 투쟁”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쩝).
오로지 독립영화에서만 쟁투되고 있는 한국의 성정치
미국이 언더그라운드에서 16mm필름으로 아방하게 성정치를 할 동안, 패전국 일본에선 요상한 형태로 성정치가 태동한다. 바로 핑크무비다. 알다시피, 핑크무비는 10분마다 여자의 누드가 나오는 필름에로영화를 말한다(필름이 없어진 지금, 비디오로 찍힌 에로물은 V-cinema라고 통칭한다). 말인즉슨, 모든 핑크무비는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에서 “범”하는 섹스영화라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남근 중심적 포맷으로 성정치를 한 분이 계셨으니, 바로 와카마쓰 고지 감독이다. 그의 수십편에 달하는 필모에선 남근 중심적 사고가 일관되게 드러나지만, 그런 사고 속에서도 성과 정치의 관계, 즉 인간과 국가의 애증관계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일본 성정치영화의 최전방이라 하겠다. 게다가 하도 성정치를 하셔서 그런지, 후기작 <천사의 황홀>에선 능동적인 여성 적군파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물론 어떤 여성 캐릭터는 여전히 남근에 붙어먹는 간신배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극복하려는 사상적 전환을 보여주기도 했다(와카마쓰 고지 감독이 돌아가셨을 때 많이 슬펐는데, 1년 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가셨을 땐 더 큰 슬픔이 찾아오는 걸 느끼며, “아, 오시마 나기사가 와카마쓰 고지보다 훌륭…” 아,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는 무수히 많은 젠더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 아피찻퐁 위타세라쿤, 그렉 아라키, 존 카메론 미첼 등 전투적 작가들이 왕성히 활동 중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대한민국엔 어떤 젠더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일단 확실한 건 상업영화 중 젠더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잠깐. 2002년작 <로드무비>가 젠더영화인지는 두고 생각해보자. 다음에 김인식 감독님 만나면 한번 물어볼랑께). 성정치는 오로지 독립영화에서만 쟁투되고 있다. 가장 최전방은 이송희일 감독과 김조광수 감독일 것이다. 최근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 김경묵 감독도 성정치의 최전방이고 이혁상, 소준문, 김일란, 홍지유, 죄다 최전방이다. 한 사람도 후방인 사람이 없다. 죄다 최전방이다. 그리고 그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건 관객의 편견? 세상의 괄시? 열악한 제작환경? 아니올시다. 그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건 황망하게도 검열기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다. 영등위는 그들이 젠더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청소년 모방 위험”이나 “욕설 수위” 같은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며 영화를 사장하려 한다.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사이?> 같은 청소년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줬다가 법원까지 가서 청소년 관람불가 취소 판결을 받은 건 유명한 일화다. 게다가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감독들을 타기팅해서 불리한 등급을 주는 혐의까지도 받고 있다(얼마나 ‘젠더’가 싫으면 이리 못된 짓을 할까. 그렇다고 ‘섹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에 제한상영가를 주는 걸 보면. 휴우).
나의 오래된 소망이 하나 있다. 바로 영등위 박선이 위원장님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 영화 목록은 제한상영가를 받은 영화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 분이 한분 더 생겼다. 박원순 시장님이다. 그분과는 젠더영화들을 보고 싶다. 와카마쓰 고지의 작품도 좋고, 그렉 아라키의 작품도 좋지만, 박원순의 반인권적인 처사를 규탄하며 시위에 동참한 이송희일과 김조광수의 작품을 특히나 같이 보고 싶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 섹스와 젠더의 차이를 아시냐고. 분명 잘 대답하실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분이니(반면, 박선이 위원장님은 대답 못할 것 같다. 뭐, 박원순이 가르쳐주면 되겠지). 그렇게 잘 대답하시면, 난 다시 묻지 않으련다. 그리고 영화나 보라고 할 거다. 백마디 말보다 단 하나의 이미지가 진실된 법이니까. 스크린 위의 조그만 섬광들이 거대한 이념을 만들어낼 테니까. 원순씨의 인권과 행복추구권에 대한 열망을 다시 되돌려놓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졸고 있는 박선이는 누가 깨우냐,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