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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왜 우리는 조그마한 일에만…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4-12-09

김수영의 시가 울컥울컥 소환되는 시대다. 왜 우리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비정상회담>이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본 기미가요가 흘러나오자 공분한 시민들이 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아우성쳤다. 결국 해당 프로듀서가 경질됐다. 이때 시민들은 공영방송 KBS 이사장의 친일 문제에 관해서는 왜 문제삼지 않은 걸까? 조부의 친일 행적을 두둔하는 이사장의 식민사관은 문제될 것이 없던가.

왜 우리는 정치인들 병역 기피에 관해서는 무섭도록 관대하면서 연예인의 병역 기피에 관해서는 사력을 다해 정의를 부르짖는 걸까? 천문학적인 혈세를 4대강에 쏟아붓은 MB(이명박)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용적이면서 왜 연예인 탈세 문제에는 그렇게 혈안이 되는가. 아동들 무상급식을 비롯한 사회복지기금을 줄이는 데 온갖 뻔뻔한 수사를 들이대는 정치꾼들과 장사치들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 왜 우리는 아이를 굶겨 죽인 한 가난한 여성에겐 광기의 마녀사냥에 나서는가. 세월호라는 국가적 재난에 대해 한톨의 의무도 다하지 못한 박근혜 정부에는 표를 몰아주면서 왜 우리는 언론이 떠다민 한명의 범죄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몸서리치도록 분노하는가.

단지 정의감의 무게 차이일 뿐인가, 분노의 크기일 뿐인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불안과 위험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실존적인 공포를 덜어줄 대리표적’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회구조를 들여다보는 대신, 자신의 실존적 공포를 덜어줄 대리표적들에게만 분노를 투사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개인들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방치된 서바이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도생으로 흩어진 개인들은 ‘공통적인 것’에 대해 사유할 힘을 잃어버린다. 사회적 연대는 희미해지고, 불안은 엄습하고, 타자는 그저 성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 대신, 여름밤 나방처럼 자신의 실존적 공포를 투사할 만한 사소한 사건들에 맹렬히 달라붙어 분노를 태우고, 스스로를 정의로운 시민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거대한 착각이다.

그것은 흡사, 김수영이 말한 포로수용소 수감자의 착각과 같다. 세상에 대한 사유를 잃어버린 채 감옥 안에서 스펀지와 거즈 접는 것에만 분노하는 수감자의 모습이야말로 사소한 것에만 분개하며 자족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그 사소한 분노들과 그 감옥 면적만큼의 정의로움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것은 통제된 분노이자, 관리된 공분일 뿐이다.

감옥 안에서 TV 속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연예인에게서 대리표적을 발견하고 공분하는 수감자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유의 크기를 상상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왜 우리는 자유를 상상하지 못하는가. 자유란 사람과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겨룬 채 삶의 룰을 바꿀 때, 게임의 규칙을 깨뜨릴 때 얻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