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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만들어진 두려움
박주민(변호사) 사진 최성열 2014-12-08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제한상영가 취소 판결과 영등위의 재심의 요청에 대해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이하 <자가당착>)가 지난 7월10일 대법원으로부터 제한상영가 최종 취소 판정을 받았다. 김선 감독은 영상물등급위원회를 상대로 사과를 요청했지만 재심의하라는 답변만 받았다. <자가당착>의 변론을 맡았던 박주민 변호사가 현재 영상물 등급 심사의 문제와 실질적인 개선 방안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제한상영가. 네이버 지식백과를 보면 이렇게 나온다. “영화는 전체 관람가(ALL), 12세 이상 관람가(12), 15세 이상 관람가(15), 청소년 관람불가(18)와 제한상영가로 상영 등급이 나뉜다. 제한상영가는 제한상영관에서만 개봉할 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몇몇 제한상영관이 있으나 관객수가 적어 거의 폐관되어 사실상 제한상영가 영화는 상영이 힘든 실정이다.” 친절한 설명이지만 제한상영관이 현재 존재하지 않기에 상영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틀린 설명이다.

영화에 대해 국가가 등급을 분류하고, 일부 영화에 대해 실제로는 전혀 볼 수 없는 제한상영가라는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는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박선이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도 지난 11월26일 한 기자회견에서 “제한상영가 문제에 모순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힐 정도이다. 대표적인 문제점은 두 가지 정도다. 우선 국가가 예술 그리고 그를 통해 형성될 국민의 정신세계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논란을 가져온다. 그리고 예술의 특성과 모순된다는 문제도 있다.

국가가 선(善)할까

국가가 국민의 정신세계의 안녕을 위해 무엇을 보고 들을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전제하에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국가가 선(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무엇이 국민의 정신세계에 이로운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투른, 심지어는 손님을 살해하여 금품을 뺏으려는 이발사에게 면도칼을 쥐어주고 눈감고 있는형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가는 선할까? 선하다고 해도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을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전능(全能)할까? 국가가 선하지 않기에 오히려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것이 근대 이후 법철학의 일반론이다. 실제로도 국가가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벌인 무수한 잔학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2차대전 당시 벌어졌던 유대인 학살, 지금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인종청소 등.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잔학행위 중 많은 경우는 국가가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일어났다는 점이다. 또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그 인간이 만든 제도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자유주의 철학에서는 상식이다. 우리 헌법 역시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점은 우리에게는 헌법적 상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두 가지 조건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았는데도 국가가 국민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어떤 자극이 사람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잘못되게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비록 명확한 실체는 없지만 광범위하게 동의되어 있다. 두려움에 기인한 제도들은 통상 스스로를 넓히고 강하게 하는 자기확장성을 갖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자기확장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명확한 두려움에 기초한 제도는 그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을 가질 수 없어 끊임없이 불필요한 인권침해를 낳는다. 제한상영가 등급분류제도 역시 두려움에 기초한 것이기에 확장되고 강화될 우려가 있으며, 명확한 기준이 없어 표현의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에 대한 불필요한 침해를 낳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 두려움을 해결할 주체가 원래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국가 이외에 딱히 없다는 곤궁함이다. 한마디로 두려움은 큰데 그 두려움을 해결할 주체가 명확히 보이지 않으니 부작용이 우려되더라도 국가에 이 역할을 맡긴 셈이다.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배심제와 같은 시민판정단 운영

서투른, 심지어는 손님을 살해하여 금품을 뺏으려는 이발사에게 면도칼을 쥐어주고 눈감고 있는 형국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실체 없는 두려움과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 이 싸움은 “과연 성인이 스스로 판단해서도 자유롭게 못 볼 정도의 영화가 있느냐”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성인들의 수준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답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주체가 국가뿐이라는 곤궁함도 해결해야 한다. 국가가 나서서 영상물의 등급을 분류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몇몇 법률가나 전문가가 가지고 있는 ‘리걸 마인드’나 ‘문화적 감수성’에 모든 판단을 일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음란물이나 폭력물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제대로 된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거나 편향되어 보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판단 기준에 대한 열린 토론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마련된 기준 역시 수시로 열린 토론을 통해 다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영상물 등급분류 과정을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방안도 고민할 수 있다. 제한상영가 등급분류를 고민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서 마치 형사재판에서의 배심제와 같은 시민 판정단을 운영하여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다. 소수의, 소위 전문가가 아니라 다양한 시민들의 성향과 취향 그리고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국가가 영상물 등급분류의 주체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가를 통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보다 더 나아가서 아예 영상물 등급분류 자체를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하는방안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구성한 심의체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관람객은 그러한 정보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정보가 적합하지 않다면 그 정보를 제공했던 자는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처음에는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올바르게 제공되고 유통될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발전했나

마치기 전에 제한상영가 등급분류가 영화예술에 모순되는 부분도 간단히 지적하려 한다. 영화예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 인습과 관성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서 일 것이다. 이러한 거부가 시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예술의 발전을 막는 것이자 그를 통한 사회의 발전을 막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제한상영가 등급분류 역시 예술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이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국가가 국민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것 자체가 지금 당장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성인들도 자유롭게 못 볼 영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영화라고 판단하는 것이 소수의, 소위 전문가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역시 문제다. 단순히 지금 당장 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못 본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습과 관성을 탈피함으로써 발전하는 예술의 발전을 막고 사회의 발전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한상영가 등급분류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