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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학생~ 학생! 어이쿠 미안해요~

<뻔뻔한 딕&제인> <자학의 시> 등에서 찾아본 백수의 도(道)

<뻔뻔한 딕&제인>

평일 대낮에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 학생!”을 애타게 외치기에 거 참, 어떤 학생이 어르신 부르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못 들은 척하고 제 갈 길만 가는 건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에 노인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야, 나? 나, 학생? 빵끗 웃으며 뒤로 돌아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할머니, 내 얼굴을 보고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으셨습니다. 죄송해요, 나이 생각 못하고 이따위로 옷을 입어서. 호숫가에서 2열 횡대로 도열하고 대기 중이던 할머니들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나는 쓸쓸하게 돌아섰다. 내가 딱히 학생 차림을 하고 나간 건 아니었다(눈치는 없어도 양심은 있다). 그냥 흔한 전업주부로 보이고 싶어서 고심 끝에 고른 것이 레깅스였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역시 주부들의 아이콘이라는 긴 니트가 없어서 대신 뒤집어쓰고 나간 후드 티와 엉덩이 가린답시고 걸친 데님스커트가 문제였을까. 벗이라곤 노처녀뿐이니 사면초가 막막하여도 물어볼 곳 하나 없어라.

그런데 나는 왜 전업주부로 보이고 싶었는가.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직업이 없는가. 안 알려준다. 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온 십 몇년, 그간 숱한 직장과 직종을 전전한 끝에 나는 끝내 백수의 도(道)를 연마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신세계다. 열두 시간 자고 눈을 뜨면 아무 할 일 없는 열두 시간이 펼쳐진다. 직업이 있을 때는 백수처럼 입고 다녀도 당당했다. 하지만 정작 백수가 되면 죽어도 백수로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진짜 백수의 심리다. 내가 너무 남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 건 아니다(그랬다면 지금 백수도 아닐걸). 이건 백수라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존재의 정체성이 부여하는 종(種)의 특성이다. <뻔뻔한 딕&제인>의 딕(짐캐리)도 그랬다.

<자학의 시>

딕 하퍼, 푼돈 받으면서 인쇄매체 산업에 종사한 저임금 노동자였던 나하고는 격이 다른 금융인. 홍보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하자마자 회사가 파산해 백수가 된 그는 저금과 연금을 날렸지만 교외 주택과 가정부, 고급 승용차를 포기하지 못한다. 잔디까지 걷어가버려서 주섬주섬 남의 집 잔디를 모아다 정원에 깔던 딕은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직종에 눈을 뜨니, 강도다. 마찬가지로 백수인 마누라 제인을 운전사 삼아 주유소, 슈퍼마켓, 은행을 가리지 않고 턴다. 연말정산 때마다 배우자 공제 항목 때문에 설움을 겪었는데 백수가 되어도 서럽구나. 차도 없고 총도 없고 더불어 강도짓 할 마누라도 없다니.

백수도 서럽지만 나 홀로 백수는 더욱 서러운 법이다. 만화 <자학의 시>의 이사오는 뭔가 마음에 들지않으면 밥상을 뒤집어엎는 것이 버릇인데 세상 거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밥상 엎느라 바쁜 백수건달이다. 백수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건달. 근데 마누라는 있어. 뭐가 이렇게 불공평하지. 굶고 다니면 밥해줘, 술 떨어지면 술 받아와, 옆집 아줌마가 버티고 있어도 뽀뽀까지. 이런 마누라만 있다면 나도 당당한 백수가 되어 추리닝에 슬리퍼 끌고 다니겠다. 아, 난 여자지. 누군가의 마누라는 될 수 있어도 누군가를 마누라로 얻을 수는 없어.

<티끌 모아 로맨스 >

하지만 딕을 보고 깨우친 바 있어 나도 새로운 직종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라고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라는 법이 있나. 그 옛날 나는 친구들이 과외만 할 때 타자와 배송 대행과 바텐더를 비롯하여 숱한 아르바이트의 영역을 넘나든 개척자였지(그래 봐야 수입은 과외의 반이었지만). 이 넓은 세상엔 5년 만에 2억원을 모은 아르바이트의 대가, 모든 실업자의 롤모델, 아르바이트만 해서 몇달에 한번 100만엔을 모은다는 일본처녀 <백만엔걸 스즈코>보다 한수 위인 한국의 아름다운 백수가 있으니, <티끌 모아 로맨스>의 홍실(한예슬)이다.

홍실이 설파하는 절약과 아르바이트의 비법은 눈물겹다. 한개 50원짜리, 하루 세개씩 1년을 모으면 옥탑방 1년치 수도요금이 나오는 빈 병을 건지기 위해 옥상과 옥상 사이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슬프다, 그동안 내가 버린 무수한 맥주병이 눈앞을 스쳐간다. 구태여 빈 병 모으러 다니지 않고 내가 마신 것만 팔았어도 한달치 안줏값은 빠졌을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산증인 홍실을 보며 나도 그녀가 거친 숱한 아르바이트 중에 하나를 해볼까 했는데, 때마침 결혼식 하객 아르바이트 모집 글이 떴다. 20대~30대 중반 예쁜 여자분들 모셔요. 뭐야, 걸리는 조건이 하나도 없어, 그물코가 왜 이렇게 큰 거야. 신부 친구들은 전부 젊고 예쁜가요, 안 예쁜 노안 친구도 하나쯤 있어야 신부가 돋보이지 않을까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으니 나 홀로 백수보다 서러운 건 나이 먹은 나 홀로 백수다.

<반가운 살인자>의 중년 백수 영석(유오성)을 보라. 마누라가 있기는 하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아르바이트 삼아 하는 일이 온갖 사소한 일을 신고하여 상금 타먹는 거다. 예를 들면 불법 사은품으로 호객 행위를 하는 신문 보급소 고발.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구매력 없는 동네 백수라고 소문났는지 종일 집에 있어도 신문 보라는 사람 하나가 없다. 음식물 쓰레기 무단 투기? 나부터 잘하자.

그래도 백수로 살다 보니 세상 변한 게 눈에 들어온다. 몇년 전만 해도 동네 백수 아저씨들은 편의점 앞에 모여 막걸리를 마셨는데 요즘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전업주부들이 한다는 것처럼 햇빛 좋은 테라스에 앉아 브런치라도 먹어볼까했지만 아저씨들이 너무 붐빈다. 내 친구는 퇴직한 아빠가 날마다 등산 가서 파전에 막걸리를 먹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새 동네 예쁜 와플 가게 단골이 되었다는 걸 알고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고 한다. 아빠가 정말 등산 친구들하고 와플 먹고 다닐까, 여자하고 간 건 아닐까, 했다고. 아, 아버지. 그땐 나도 함께 의심했지만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너네 아빤 정말 아저씨들하고 와플 먹고 다닌 거 맞아. 내가 보증한다.

이것만 갖추면 ‘갓수’도 가능

백수가 폐인으로 진화하는 필연을 막아주는 두세 가지 것들

<악마 같은 여자>

동반자 마누라가 없다면 친구라도 있어야 한다. <악마 같은 여자>의 제이디(잭블랙)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잘린 다음 닐다이아몬드의 노래와 스포츠 중계 말고는 아무 낙이 없는 백수로 전락하지만 직업이 있는 듯 없는 것 같은 친구들 덕분에 심심하지가 않다. 오히려 드라마틱한 사건이 너무 많아 문제. 잭 블랙만 친구가 있냐, 나도 친구가 있다. 하지만 백수 경력 10년이 넘은 나의 친구, 바빠. 그동안 다져온 백수 인맥 관리하느라 분주해. 그러고 보니 백수에게 필요한건 동반자가 아니라 경력인 건가.

<반가운 살인자>

취미 생활 <반가운 살인자>의 영석은 모종의 이유로 동네에 출몰하는 연쇄살인범을 쫓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으니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신문 스크랩, 시간이 많으니 구석구석 발로 뛰어 수집한 증거, 시간이 많으니 방대하고도 방대한 범죄학 서적 독서에 바탕을 둔 프로파일 분석. 어찌나 치밀한지 형사들이 자문을 할 정도다, 백수의 잉여력을 우습게 보지 말라. 백수가 되고 나서 하루에 책을 두세권씩 읽다가 활자 멀미가 나기 시작한 나는 도서관에서 소설 대신 요리책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코코뱅을 만들고 있다. 들어는 봤는가, 홈메이드 코코뱅. 김장철이라고 김장은 못 담가도 수육 정도는 라면 끓이는 것만큼 쉬워졌다.

<스쿨 오브 락>

정보력 동네에서 공연 예술 축제가 열렸다.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동시다발로 열리는 몇 가지 공연의 스케줄과 공연 장소를 섭렵한 나(백수)는 옆 동네 친구(프리랜서, 똑같이 집에 있어도 백수와는 엄연히 다른)와 길을 나섰다. 그리고 빈틈없는 시간표에 감탄한 친구는 저녁을 샀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백수에게 몇 안 되는 장점이 있다면 정보력이다. <스쿨 오브 락>의 듀이(잭 블랙)도 친구에게 온 전화를 가로채 초등학교 임시 교사 일자리를 얻었다지. 그러고 보니 잭 블랙은 여기서도 백수, 저기서도 백수, 직업을 모르고 봐도 왠지 백수. 그대가 진정한 백수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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