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세월호 사건 관련 글을 읽은 독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진보는 세월호를 그만 팔기를. 다른 부모들, 학교폭력으로 죽은 자식, 중증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 심정도 생각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진보가 아니며, 세월호를 산 적도 판 적도 없다. 그렇게 큰 배를 살 돈이 없다”라고 답장하고 싶었지만, 이런 농담을 하기에는 나름 심각한 문제제기다. 이는 ‘시체장사’ 류의 언설과 다르게, 다른 고통도 많은데 세월호만 조명받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얘기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많다. 그들의 고통이 세월호 유가족보다 ‘더한지, 덜한지’는 아무도 판단 할 수 없다. 독자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맞다. 고통에는 위계가 없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바다다. 그러나 세상 모든 자녀의 죽음이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원통한 일이지만, 사건의 성격과 맥락에 따라 어떤 비극은 뉴스가 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뉴스 여부는 사회적 합의이자 정치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다만 나는 불행을 ‘경쟁’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누가 더 고통받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정의로운 문제제기가 있고, ‘적’에게 이로운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있다. 논쟁거리는 후자다. 끼니가 늦은 사람도 며칠을 굶은 사람도 배가 고프지만 같은 배고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논란도 없다. 문제는 세월호 사건의 ‘범(汎)가해자’들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위다. “진보나 야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불순한 유가족과 순수한 유가족이 따로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불순세력은 세월호를 계속 기억하려는 사람들이다.
공감은 제로섬게임(zero sum game)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중증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나 학교폭력 희생자의 부모의 호소에 대해서 “자식 팔아먹는다”고 비난할까? 세월호 사건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월호를 팔아먹는다”라는식으로 생각한다. 이들이야말로 자기 이익을 위해 세월호 사건을 세일즈하는 세력이다. 자기에게 불리한 정치적 이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특수한 사건으로 국한시키려 한다. 이것이 유가족을 모욕하고 좌절시키려는 이유다. 가장 비극적인 사태는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과 그 고통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기보다는 불행을 경쟁하는 패러다임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경쟁, 겨루기는 생산과 승부를 위한 것이다. 이런 경쟁이 생산하는 것은 약자들끼리의 증오요, 고통받는 사람들을 조준, 모욕함으로써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 승자가 된다. 위로는 파이 뺏기 게임이 아니다. 공감은 보편적인 인간성이다. 치유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퍼내고 나눌수록 샘솟는 마음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