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은 꿈과 무의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경력을 바쳤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복수의 열망만으로 움직이는 인간을 그린 <메멘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트러진 불면증의 세계에 관한 <인썸니아>, 삶 자체를 마술로 둔갑시킨 위대한 마술사들의 몸과 정신이 분열하는 과정을 좇는 <프레스티지>, 제목부터가 ‘무의식의 동기’인 <인셉션>. 심지어 그가 손댄 <배트맨> 시리즈조차 어둠과 박쥐로 표상되는 배트맨의 분열적 자아가 중요한 모티브다. 놀란의 배트맨은 도시의 영웅이라기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투사해 악당을 살해하고 다니는 정의로운 미치광이에 가깝다. <인터스텔라>는 놀란의 필모그래피에서 무척 예외적인 영화에 속하는데, 블랙홀에 대한 묘사는 하드 SF 마니아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영화 속 블랙홀의 특이점은 우주의 저편이라기보다 기억과 무의식의 저편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놀란이 그리는 꿈과 무의식은 언제나 고통 혹은 후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떠올려보면 우리가 길몽을 꾸는 일은 많지 않다. 꿈꾸는 사람은 이가 빠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몸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위에 눌린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짝사랑과 결혼하는 꿈을 꿔본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많은 문화권에서 ‘꿈’은 희망을 은유하는 단어로 빈번히 사용된다. 이 딜레마에 최초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꿈의 58%가 불쾌한 느낌이며 고작 28.6%가 유쾌한 인상이라는 수집 통계를 바탕으로, 오히려 “꿈은 소망 충족이다”라고 결론내렸다. 꿈의 불쾌한 포장은 일종의 위장과 검열로서 그는 ‘꿈의 왜곡’이라고 불렀다. 가장 불쾌한 지점, 해석의 저항이 격렬하게 발생하는 곳에 꿈의 본질이 담겨 있다. 꿈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염려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거꾸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는 꿈의 기작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 정치를 비유적 사례로 들었다. 언론은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진실은 정치적 압력을 받는다. 언론은 권력에 의한 검열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위장된 자기검열을 행하게 된다. 반대로 국민들이 어떤 관료의 파면을 요구할 때, 군주는 권력의 이상 없음을 증명하려고 그 관료를 오히려 포상한다. 언론의 자기검열과 군주의 포상은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드러내는 노이로제 증세로 볼 수 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항소심에서 검찰은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다고 말하며 왜구를 물리치러 나갔던 것처럼 물질보다는 건전한 정신이 더 중요하다”며 뜬금없이 CJ 영화를 호의적으로 인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CJ는 정치적 영화들에 상영관을 내주지 않거나 개봉을 미루는 자기검열을 행사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프로이트적인 연구 주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