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작은 물고기도 큰 물고기를 삼킬 수 있다

<슈팅 라이크 베컴> <맨발의 꿈> 등에서 찾아본 축구 선수의 도(道)

<슈팅 라이크 베컴>

멜 깁슨의 심각한 대작 <아포칼립토>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가 처자식 만나겠다며 열심히 도망치는 전사 ‘표범 발’이 밀림을 헤치고 나와 정면에 등장한 순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호나우지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전부 웃음을 참느라 숨이 막혔다, 나만 빼고. 왜냐고? 호나우지뉴가 누군지 모르니까.

나는 스포츠에 있어서는 백치에 가깝다. 아는 외국 축구 선수라고는 마라도나와 펠레가 전부이고(나한테 베컴은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지나가던 엑스트라, 지단은 <무한도전> 게스트, 호날두는 호나우지뉴 검색하다가 얻어 걸린 남자), 추신수가 <무릎팍 도사>에 나오기 전까지 ‘추 선수’는 대체 본명이 뭐길래 너도나도 이름 대신 직업으로만 부르는 건가 궁금해했다. 야구장 한번 가본 적이 없는 3X년 인생, 얼마 전에야 야구장 가면 농약처럼 생긴 생맥주 통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호스로 맥주를 뿜어준다는 걸 알고는 땅을 쳤지.

그런 나를 첫 직장의 상사들이 긍휼히 여기사 ‘네가 모르는 삶의 기쁨을 하사하겠다’며 주말마다 벌어진 회사 대항 축구 경기에 치어리더로 동원하였으니,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축구라면 아주 끔찍하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축구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멀쩡한 중년 남자들이 저 멀리 굴러가는 공 하나를 쫓아 광활한 운동장을 표범 발처럼 뛰어다니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며, 자기 아들은 반드시 축구 선수로 만들겠다며 되도 않는 꿈을 꾸는 것인가(아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나봤자 아빠 닮아 머리 크고 다리 짧다면 축구 선수가 될 리 만무한데도).

축구 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영국 소설가 닉 혼비는 리버풀 훌리건의 난동으로 이탈리아 유벤투스 클럽 팬 39명이 사망한 사건에도 축구를 포기하지 않고, 축구 팬의 도(道)만으로 한권을 채운 에세이 <피버 피치>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죽어서도 축구장에 묻혀 축구장의 유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제 그 소원은 이룰 수 없다. 죽은 남편을 뿌려주겠다며 유골함을 들고 오는 미망인들이 하도 많아서 규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국은 축구의 나라, 영국은 유령의 나라.

<맨발의 꿈>

하지만 축구 선수가 되는 길은 그보다 멀고도 험하며 마찬가지로 멈출 수가 없다. 나는 그걸 <맨발의 꿈>을 보고 알았다. <맨발의 꿈: 돼지 원정대> 정도로 부제를 붙일 수 있는 이 영화는 동티모르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돼지가 걸린 내기 축구를 했다가 지는 바람에 돼지를 되찾을 때까지 꼬마들을 훈련하기로 결심한 한국의 전직 축구 선수 이야기다.

그 꼬마들 중 한놈은 프로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갈 여비를 마련한답시고 자동차 오디오를 훔치다가 걸리는데, 너무 비싼 걸 건드려 훈방은 안 되고 감방을 가야만 한다. 많고 많은 오디오 중에 하필이면 뱅앤올룹슨을 점찍은 꼬마,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골!>의 미국 이민자 청년 산티아고는 축구는 무슨 축구냐며 나하고 일이나 하자는 아빠가 집에 오기 전에 할머니한테 차비 받아 영국으로 튀고, <슈팅 라이크 베컴>의 인도 소녀 제스는 언니의 결혼식을 하다 말고 풀메이크업에 사리를 두른 상태로 튄다. 입단 테스트를 받으려면 절도와 도주 정도는 기본인 건가.

유럽과 아시아 사람들만 있던 자리에 브라질 사람이 나타났을 때였다. 우리 모두가 궁금했던 건 오직 하나, 브라질 애들은 왜 그렇게 축구만 하고 노는 건가, 였다. 그는 말했다.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되거든. 브라질엔 가난한 사람이 많아.” 우리는 숙연해졌다. 누군가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걔네는 축구 선수 되는 게 꿈이겠네?” “아니, 푸조 들어가는 거.” 동네에 푸조 공장이 있다고. 그래, 꿈은 현실적인 게 좋아. 축구 선수 되어봤자 잘못하면 <맨발의 꿈>처럼 하는 사업마다 쫄딱 망하다가 결국엔 돼지를 쫓는 거지.

<골!>

어쨌든 그것으로 오랜 의문이 풀렸다. 축구는 가난한 아이들의 스포츠. 펠레는 어릴 적에 기차역에서 땅콩을 훔쳤고 호날두는 차비가 없어서 축구 클럽에 못 갔다지. 그러고 보니 사회인 야구를 하는 사람들도 그랬다, 야구가 어른의 스포츠인 건 비싼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다큐멘터리영화 <누구에게나 찬란한>은 가난한 아이들이 ‘희망FC’를 만들어 뛰는 이야기인데, 구단이 해체 위기에 처하자 모금을 시작한다. 전국 각지에서 성원이 답지하여 모인 돈은 630만원이던가. 그걸 보고 나는 아이들의 꿈이 꺾였다며 슬퍼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장면이 구단 창단! 630만원으로! 역시 축구다.

그렇다, 축구엔 반전이 있다. <누구에게나 찬란한>이 예상을 뒤엎고 재미있어서 깜짝 놀란 김에 같은 감독의 <비상>도 봤는데, 꼴찌팀 인천 유나이티드가 나온다길래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끝장나는 줄 알았다가(난 스포츠엔 백치니까 그 팀이 지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거든) 다시 한번 예상을 뒤엎고 훈훈하게 잘나가서, 매우 기뻤다.

우루과이의 좌파 지식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1997년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어떻게 잡아먹는지 직접 확인하십시오”라는 문구로 축구 경기를 광고한 폭스 스포츠를 비웃으면서 썼다. “98년 월드컵에서는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를 가시까지 모두 삼켜버리는 이변이 여러 번 발생했다. 바로 그것이 축구와 인생이 지닌 멋진 점이다.” 이변이 필요한데 역변만 일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세상에서 스포츠 백치이자 축구 혐오자인 나는 진정한 이변을 원하며 어디 볼만한 축구 영화 없나 VOD 목록만 뒤지고 있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지만…

멀고도 험한 축구 선수의 여정에 힘이 되어주는 두세 가지 양식들

근성 1966년 영국 월드컵에 참가한 북한 축구 대표팀은 작은 물고기였다. 평균 신장이 162㎝, 나랑 비슷해. 하지만 그들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진출했고 포르투갈을 상대로 세골을 먼저 넣는 기적을 이루었다. 옛날에 이탈리아 축구팀은 무솔리니가 무서워서 이길 수밖에 없었다던데 북한도 그랬던 걸까. 영국인이 찍은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을 보다가 그 비밀의 일부를 엿보았다.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대표팀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 “본때를 보여주리라”. 이것이 작은 물고기의 근성이다.

당근 갈레아노는 말했다. “마라도나는 다리로 돈을 벌어 영혼으로 지출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축구 선수의 연봉만 언급하는 언론을 한탄했지만, 영혼으로 쓰고 싶은 돈이 없었다면 마라도나의 다리도 그렇게 움직이지는 못했을걸. 돈만 당근인 건 아니다. 호랑이 감독한테 혼나고 질질 짜던 <누구에게나 찬란한>(사진)의 꼬마들은 칭찬과 격려를 당근으로 장착하고 나타난 새로운 감독과 함께 날개를 단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소녀들에겐 미국 프로 리그에서 뛰고 싶은 꿈과 더불어 경기가 끝나면 키스와 포옹을 선사하는 미모의 코치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가 있다. 그렇다면 <맨발의 꿈>의 당근은? 돼지라니까.

안개에 싸인 독재자의 나라 북한, 좀비에게 점령당한 <월드워Z>의 세계에서도 쥐도 새도 모르게 전 국민이 지하로 사라졌다고 묘사되는 비밀의 왕국. 누구도 몰랐던 북한 축구 대표팀은 1966년 영국에서 몇번의 경기를 치른 다음 어느 영국 도시에서 홈팀 수준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 동네 축구팀이 워낙 약체여서 동병상련으로 그랬다고. 약한 자는 약한 자를 알아본다. 외로운 북한 팀은 그렇게 팬을 얻었다. 꼴찌면 어떠랴, 삼미 슈퍼스타즈에도 팬은 있었듯이, 인천 유나이티드에도 팬은 있었다. 심지어 소녀 팬들이. <비상>에는 ‘인유반’이라 불리며 인천 유나이티드에 한반을 통째로 갖다 바친 10대 소녀들이 나온다. 맨유만 팬이 있냐, 인유도 팬이 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