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겨울은 부음과 함께 온다. 유독 시린 소식에 한기를 더 느껴서일까.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과로사이다. 헉헉대며 바삐 살다 뒤늦게 병을 발견하고 미처 돌보거나 손쓸 겨를 없이 세상을 떠난 경우. 생계 때문이든 성취 때문이든 또 다른 이유든 제명대로 살지 못한 죽음의 상당수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5명을 떠나보내며 5년 넘도록 힘겨운 싸움을 해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사른 지 꼭 44년이 되는 날, 비수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쌍용차 노동자 153명의 해고무효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취지로 노동자들이 이겼던 원심을 깨버린 것이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 겨우 올라온 사람을 다시 밀어낸 듯한, 잔인한 판결이다. 정치적인 판결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법리적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상고심에서 굳이 항소심에서 일단락지은 손실액 부풀리기 등 회계조작 문제를 다시 따진 것도 의아하지만 “회사쪽 추정이 다소 보수적이라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회사 편을 든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어떻게 과장과 조작을 ‘다소 보수적’이라 할 수 있나. 게다가 당시 쌍용차는 해고회피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보유 부동산 가치만 3천억원이 넘었고, 무급휴직도 정리해고 뒤에야 실시했다. 기업 입맛에 따른 대량해고를 용인해준 정말 ‘나쁜 판결’이다.
어쩌자고 우리는 ‘존중’은커녕 최소한의 ‘인정’을 받으려면 제 몸을 불살라야 하는 세상을 계속 사는 것일까. 법의 저울이 기울어져 있다 해도, 이 지경인지는 몰랐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호소한 것이 이렇게 간단없이 무시될 수 있단 말인가.
제명대로 사는 것이 장래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늘도 조심조심 산다. 사람값이 이렇게나 떨어진 세상에서 별일 없이 사는 것조차 송구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