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한 여성을 보고, 단번에 그녀가 마스다 미리일 거라 예감했다. 그녀의 대표작 수짱 시리즈의 주인공 ’수짱’과 흡사한 단발머리를 한 마스다 미리는(그녀는 내한하기 한 달 전, 긴 머리를 잘랐노라고 고백했다.) 짐작보다 더 밝고, 소녀다운 모습을 간직한 작가였다. 두편의 에세이집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재출간)와 <여자라는 생물>(신작)의 국내 출간을 기념하는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 내한한 마스다 미리를 만나 긴 대화를 나눴다. 담담하지만 결코 핵심을 놓치지 않는 마스다 미리의 화법은, 그녀의 네컷 만화를 꼭 닮아있었다.
-작가님의 초기작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와 신작 <여자라는 생물>이 동시에 출간되었어요. 이 두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두 작품 모두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를 읽으며 흔들리고 불안정한 30대 여성의 마음 상태에 함께 동요했다면 <여자라는 생물>을 보면서는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작가님의 마음이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가요. 어떤 쪽이 더 좋으셨어요?(웃음)
-아무래도 30대의 입장에선 <여자라는 생물>을 보며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을 미리 체감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웃음) =(웃음) 나이가 들어갈 수록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 겪는 일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늘 던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건 40대에 접어들어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여자라는 생물>에선 여성으로서 새로운 나이에 접어들며 주저하거나 놀랐거나 당황스러웠던 경험들. 그 순간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반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는 사랑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30대에 썼던 작품인데, 당시에 제가 생각했던 결혼은 아주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이었죠.(웃음) 그러던 어느날 호텔에서 주최한 웨딩드레스를 입는 이벤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번 입어보고 나서는 ’아 이걸로 됐다’ 싶었어요.(웃음)
-만화가와 에세이스트를 겸하고 계십니다. <여자라는 생물>이란 작품을 구상하며 특별히 에세이란 형식을 취한 이유가 있나요.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할지 늘 고민을 하는데, <여자라는 생물>의 경우 정말 직설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기 때문에 에세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만화라는 형식을 취하면 내용이 좀더 마일드해지는 것 같거든요.
-첫 페이지부터 충격이 컸습니다. ’섹스 미스터리’에 대한 글이었는데,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의 수위가 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보통 신간이 나오면 어머니에게 보내드리거든요. 책을 보내면 어머니께서 재밌었다든지, 주변에 나눠주려고 하니 몇권 정도 보내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어머니가 이 책을 읽으며 제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진 않아요.
-30대 시절부터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도 인상적이었어요. 작가님이 일상에서 예리하게 건져올린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일기를 무척 열심히 쓰시는 분일 거라 짐작했거든요. 수짱 시리즈에서 수짱이 매일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는 것처럼요. =27,8살까지만 해도 일기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다시 그걸 읽어보니 너무나 생생하고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인 거예요. 죽고 나서 누군가가 이 일기를 읽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어요.(웃음) 책에 썼듯이 남자친구와 함께 간 모텔 방구조까지 일기에 그려놨는데, 그런 건 누구에게 보여줄 게 아닌 것 같아서.(웃음)
-그렇다면 작품을 구상하며 기록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편이세요? =주인공이 얘기할 법한 대사나 단어가 생각났을 때 적어놓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워낙 사소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편이라….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도 지금까지 기억하거든요. 어제 있었던 일은 종종 잊어버리지만.(웃음) 오늘 만났던 사람의 가방이 예뻤다거나, 오늘 무엇을 먹었다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작가님의 작품은 일상적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법한 고민과 생각들을 담고 있는데, 혹시 소재나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시나요. <여자라는 생물>의 경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카페에 앉아있을 때 다른 사람들 대화를 열심히 듣고요.(웃음) <여자라는 생물>의 경우에는 특히 어머니가 살아가는 방식과 저의 삶을 많이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평소 어머니와는 자주 연락하는 편이세요? =1년에 네다섯번 찾아뵈는 것 같아요. 만나뵐 때마다 늘 아버지 흉을 보시는데, 아버지와의 결혼을 선택한 건 어머니 자신이기 때문에….(좌중 폭소) 들을 때마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곤란하죠.(웃음)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님의 전작을 통틀어 작가님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되는 캐릭터에 대한 언급도 있었습니다. <주말엔 숲으로>의 세스코를 말씀하셨는데, 작가님이 만든 모든 인물들 중 가장 멜랑콜리한 느낌의 여성 캐릭터와 닮았다고 생각하시는 게 의외였습니다. =그런가요. 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얼마간 저의 모습을 반영한 인물들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세스코도 그런 인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평소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지 못하는 세스코의 성격이 특히 저와 닮은 것 같아요.
-<주말엔 숲으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여쭤보자면, 작가님의 최근작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심사들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짱 시리즈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등의 전작들이 여성의 심리 묘사에 보다 주목했다면, <주말엔 숲으로>처럼 주말의 전원생활을 즐기는 도시여성들의 이야기나 여행에 관한 에세이인 <잠깐 저기까지만>, 우주에 대한 작품 <밤하늘 아래> 등 삶의 방식이나 관심사에 대한 주제가 더욱 확장되었다는 느낌이에요.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그런 생각을 의도적으로 하며 작품을 써온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앞으로 남은 인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겠죠. 점점 더 ’일회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있었던 일은 오직 오늘밖에 경험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다보니 일상에서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최근 작가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친구랑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을 가고, 무엇을 배우는 것. 그런 것들에 아직도 관심이 많아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트레칭을 많이 하게 됐다는 점이죠(웃음). 건강을 위해서!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여성’을 테마로 한 만화와 에세이를 집필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여성 애독자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분들의 이야기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받기도 하시나요. =특별히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분들의 말씀을 듣다보면 세대와 관계없이 여성들의 고민과 관심사가 얼마간 비슷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 싫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패배한 개’, ’아라포’라는, 일본의 특정한 여성 집단을 일컫는 용어를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처음 접한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패배한 개’라는 용어의 경우 사카이 준코라는 일본의 에세이스트가 30대 이상의 싱글 여성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쓰이게 되었죠. ’아라포’는 그보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고, 일본의 멋진 35세~40대 여성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제는 그 세대가 성장하며 ’아라피프’(40대 후반~50대 이상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여성을 지칭하는 말)라는 용어도 생겨나게 되었어요. 실제로 유행하는 말을 만화에 사용함으로써 더욱 리얼리티를 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 건 아무래도 만화 수짱 시리즈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수짱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작품인지 궁금합니다. =처음에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오사카에서 도쿄로 상경을 했어요. 당시에는 요리잡지에 프라이팬이나 사과, 접시 등의 일러스트를 그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프라이팬만 그려서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여성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어떤 곳에서는 제 만화의 주인공 수짱이 너무 어둡고 평범하고 수수한 캐릭터 아니냐며 거절하기도 했어요. 젊은 여자들이 이런 작품을 읽겠냐는 반응도 있었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떤 여자가 집에서 그렇게 ’하이 텐션’의 자세로 지내나요? 어떤 여성이든 집에서는 어둡고 수수한 일상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저는 믿었어요. 그런 저의 생각을 믿고 지지해준 겐토샤와 함께 작업하게 되었죠.
-수짱 시리즈를 비롯한 작가님 작품의 매력은 매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등장인물들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방식의 작품을 구상하셨던 건가요. =우선 저 자신이 그런 설정에 대해 굉장히 즐거워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매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겹치도록 하는 것도 있고요. 제 작품을 오래 읽어주신 팬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도 종종 인물들을 교차시키기도 합니다.
-최근 가장 사랑받고 있는 인물 중 하나가 <수짱의 연애>에 출연했던 남자 캐릭터 쓰치다가 아닐까 싶어요. 쓰치다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선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하는데, 작가님의 작품에서 남성 캐릭터가 주인공을 맡는 건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집필하실 때에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저는 제 작품의 주인공들이 고민하는 점이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인류 공통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그 생각을 믿으면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전작들이 여성팬들이 많았다면,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경우 남성 독자분들의 반응이 좋더라고요.(웃음)
-작가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인물들이 매 작품을 거치며 성장하는 모습을 독자들이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최근 아사히 신문에서 ’어른이 된 여성들에게’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어요. 한국에도 출간된 <내 누나>의 후속 에피소드도 계속 연재하고 있는 중이고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고 분명 후회하는 날도 있겠지만, 그렇게 후회하는 자신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에는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만화나 에세이를 통해 계속해서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