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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모두 괜찮다

평범한 일상을 빛나는 우주로 바꾸는 마스다 미리 만화의 매력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일본의 에세이스트이자 만화가인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수많은 물음표로 가득하다. 특별할 것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일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은 누구의 삶과도 같지 않은 저마다의 것이다. 매 순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하는 불안감, 그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해결할 순 없지만 함께 나눌 순 있다는 걸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알려준다. 국내에서도 만화 ‘수짱’ 시리즈를 통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신간 에세이 <여자라는 생물>, 초기 에세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의 출간(두 작품 모두 이봄출판사 펴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전작들을 통해 돌아본 마스다 미리의 작품 세계와 그녀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한우를 싸게 파는 날이었다. 포장된 고기 더미를 파헤쳐 가장 밑바닥에서 200g짜리 채끝 한 덩이를 찾아낸 나는 문득 쓸쓸했다. 서너명이 먹을 고기를 사냥하는 또래 여자들 사이에서 나만 반가웠던, 딱 한 사람만을 위한 고기. 이걸 포장해준 정육점 아저씨, 고마워요, 혹시 썰다가 남아서 그런 건가요.

혼자 장을 보는 게 뿌듯했던 시절도 있었다. 감자 두개, 당근 한개, 양파 한개, 양상추 반개, 장난감처럼 귀여웠던 나의 장바구니, 닭이나 생선은 무서워서 담지 않았지.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누가 봐도 혼자 사는 여자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낱개로 파는 컵라면도 꼭 짝수로 맞춰서 담게 된 걸까.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다가 그 순간을 발견했다. 나는 장바구니가 어울리는 나이, 누군가의 딸보다는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그럴듯한 나이가 된 것이다. 마흔이 멀지 않았다. 그녀의 여자들처럼 나도 속으로 되뇌곤 한다. “양배추를 통째로 사는 날이 내게 올까?”

1969년생인 마스다 미리는 30대 중반의 싱글 여성 수짱이 엮어가는 ‘수짱’ 시리즈로 알려진 일본 만화가다. 이 시리즈는 일본에서만 28만부가 넘게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네컷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만화에는 특별한 드라마가 없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가끔은 실연이나 결혼처럼 큰일을 맞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그런 하루도 누군가에게는 우주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우주의 중심이다,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어느새 수짱보다 나이를 먹어버렸다고 투덜대는 마스다 미리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먼지처럼 떠돌던 우리를 그 중심으로 데려간다. 우리가 무심결에 뱉고 버리는 하찮은 질문과 의문, 한숨을 소중하게 주워 담아 0.5mm, 가느다란 펜선으로 되살린다.

수짱은 서른네살의 카페 직원이다. 고향 가고시마를 떠나 혼자 사는 그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만 셀프 우동 가게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땅콩 모양 탁자를 놓고 대충 산다. 혼자니까.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가끔 두렵고 내일이 걱정되기도 한다, 혼자니까. 그래서 수짱의 첫 번째 책의 제목은 이거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리고 이야기는, 혹은 삶은 이어진다. 수짱은 카페 점장이 되고 어린이집 조리실로 직장을 옮기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이 우주에는 수짱만 있는 것이 아니다. 퇴근길에 수짱과 만나 차를 마시곤 했지만 지금은 중매로 결혼해 아이를 낳은 친구 마이코, 무려 13년 동안 애인이 없었던 옛 동료 서른아홉 사와코, 남자친구의 청혼을 기다리며 회사에 다니는 수짱의 사촌동생 아카네 등이 자신만의 궤도를 그리며 때때로 수짱과 조우한다.

그 자신도 고향 오사카를 떠나 도쿄에서 홀로 삶을 꾸려온 마스다 미리는 근심 많은 30대 독신 여성의 나날에 묻힌 상처를 확대경이라도 든 것처럼 세밀하게 도려내어 보여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순간이 커다랗게 부풀어 툭, 하고 가슴 밑바닥에 떨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느 날의 사와코. 지하철의 자리 쟁탈전에 참가해버렸다.” 젠장, 자리 싸움에서 승리해버린 사와코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거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하고.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된다.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들과 걸음마다 마주친다. 오래간만에 만난 괜찮은 남자는 웬만하면 연하거나 애인이 있거나 운 나쁘면 둘 다이고, 아랫배에는 지방이 쌓이고(20대에는 윗배와 아랫배에 골고루 쌓였다), 마트에서는 생선 코너 직원이 저녁 반찬 하라며 살아 있는 꽃게를 팔려고 한다. 죽은 생선 만지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산 꽃게로 찌개 끓일 나이에 도달하다니, 분하다.

그렇게 되었다. 나는 아직 그대로인데 시간은 나를 앞질러 나가고, 그러다 벌어진 틈에 발목이 걸려, 삶이 휘청인다. 얼마나 다리를 길게 뻗어야 비틀거리지 않고 그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니, 그대로도 괜찮아, 마스다 미리는 말한다. 내일은 너무도 많으니까, 오늘은 수짱처럼 목욕을 하고 푹 자는 거야, 라고. 아니면 마이코와 수짱처럼 맛없는 파스타를 먹고 실컷 노래를 부르던가, “우리를 깔보지 말라고!”라는 자세로. 현미와 낫토와 검정콩을 챙겨 먹으며 지친 피부에나 신경 쓰는 것도 괜찮겠다. 세상에 균열 없는 삶은 없으니, 하루를 견딜 힘을 얻는다면, 일단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 때문에 흔히 ‘조세이 망가’(여성 만화)로 분류되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 분류가 주는 인상보다 훨씬 폭이 넓다(마스다 미리의 <나의 우주는 멀다>에서 서점 직원 쓰치다는 “좋은 향기가 나는” 여성 코믹 에세이 코너를 정리하다가 수짱 시리즈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라는 제목을 보며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수짱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언젠가는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 몇 십년의 인생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는 허망함 탓이 크다. 20대라도, 남자라도 그 두려움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남자들도 읽어도 좋다, 무섭지 않아요.

차근차근 네권이 쌓인 수짱의 이야기는 독신 여성의 일기인 동시에 평범한 직장인들의 일기이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 책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읽다보면 울화가 치밀 정도이다. 이 책에는 밉상이 거의 없는 수짱 시리즈에서 드물게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 두명이나 나오는데, 그중 한명은 무적의 낙하산, 수짱이 일하는 카페 본사 사장의 조카다!

그리하여 결국 마음껏 그녀를 싫어하기로 마음먹은 수짱은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등등의 사기를 치면서 면접을 보고 다니다가 새로운 직장을 얻어 싫은 사람은 그냥 안 보고 살기로. 하지만 도망치고 말았다는 자괴감 때문에 울적한 수짱. 그런 그녀에게 <수짱의 연애>에서 새로 만난 조리실 선배는 말한다. “‘도망쳤다’가 아니라 ‘그만뒀다’. 단지 그뿐인 거야.”

그러므로 어찌 보면 수짱 시리즈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싫어해도 괜찮을까? 달아나도 괜찮을까? 거기에 수짱은, 마이코는, 사와코와 아카네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필요는 없다. 마스다 미리의 또 다른 제목처럼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그 질문들을 잊지 않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서른일곱 수짱은 애인이 있는 네살 연하의 서점 직원 쓰치다와 <수짱의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서른일곱인데도,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데도.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10년이 지난 뒤에도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을까. 마스다 미리는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을 그 답처럼 내민다. 날마다 처음처럼 좋은 날이 될 수는 없겠지만 무심코 놓쳐버리는 순간들을 붙잡는다면, 둥실, 작은 행복이 떠오를 거라고 일러준다. 작지만 뿌듯한 행복을 싣고 평범한 일상의 끝에서 맺힌 홀씨가 바람에 실려 가볍게 날아오를 거라고.

치에코씨는 집에서 구두 수선 가게를 하는 남편 타쿠짱과 11년째 살고 있다. 아이는 없지만 봉제인형 코로짱이 있으니까 세명이 필요한 보드게임도 문제없고, 타쿠짱이 너무 좋아도 가끔은 혼자 차를 마시고 싶지만, 그럴 때면 전화만 하면 된다. 타쿠짱은 혼자 저녁을 차려 먹을 거다. 그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카트를 미는 타쿠짱의 뒷모습이 좋아서 한 발자국 떨어져 그 뒤를 따라가는 치에코씨에게, 연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스다 미리는 연애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만화와 글이 함께 있는 그녀의 에세이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은 나이 든다는 것에 관한 상념과 함께 그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두근거림을 향한 푸념이 늘어진다. 10대 여자아이와 20대 아가씨만 누릴 수 있는 그 무엇. 30대가 되어 비싼 바에 들어가 칵테일을 마신다고 해도 롯데리아에서 체육부 선배가 사주는 밀크셰이크 한잔 마시지 못했던 것의 보상이 되지는 않는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30대의 칵테일과 10대의 밀크셰이크라는 것은.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그보다 못한 건 아니다. 치에코씨는 만두 찍어 먹는 소스를 어떻게 섞어야 타쿠짱의 입맛에 맞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저녁, 치에코씨는 만둣집에서 설렌다. 만둣집 따위에서도, 가슴은 쿵쾅거린다.

가끔은 부작용도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치에코씨는 함께 있는 저녁이 너무 행복하다가도, 수십년이 지나 혼자 남은 타쿠짱이(치에코씨는 대체로 자기가 더 오래 살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쓸쓸하게 밥을 먹거나 도시락을 사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울어버리곤 한다(이 책의 원제는 <울보 치에코씨>이다). 하지만 그런 눈물마저도 결혼 또는 연애의 선물이다. 울고 웃고 다투고 화내는 생의 희로애락이 잔물결처럼 일상을 흔들어, 치에코씨는 심심할 일이 없다.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마스다 미리처럼 “내 마음은 아직 10대 사춘기 그대로인데(어이 어이), 나이만 멋대로 늘어난 것이다”라고 탄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미래. 시간은 사포처럼 삶을 쓸고 지나가 모든 것이 밋밋하게 마모된다는데,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던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치에코씨와 타쿠짱은 어느 날 보았던 노부부처럼 한마디 나누지도 않으면서 만두를 먹고 있을까.

그 순간, 수짱을 떠나서도 섬세하고 다정한 마스다 미리는, 아주 오래 알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순이 넘었지만 엄청나게 귀여운 두 사람.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누구와도 다른 개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마스다 미리의 엄마와 아빠이다.

마스다 미리가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쓰고 그린 에세이 <엄마라는 여자> <아빠라는 남자>는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짱의 친구 마이코가 아이 유모차를 밀면서 서글프게 묻는 질문, 남편과 아이가 있어 얻어낸 이 안전한 우주에서, 나는 어디로 갔을까.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40년이 넘게 엄마와 아빠를 지켜본 마스다 미리는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여기에 있잖아, 이 노인네들을 보라고.

마스다 미리의 아빠는 대단한 사람이다. 중졸 학력으로 일급 건축사 자격증을 땄고, 마스다 미리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리고 딸들이란 대부분 모르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친구들 말에 의하면 배우처럼 멋있게 생겼다. 은퇴 이후에는 뭘 할지 몰라 맴돌 줄만 알았는데, 하루 두 시간 산책을 비롯해 가을날의 다람쥐처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엄마 또한 대단하다. 누구에게나 밝고 친절한 엄마는 단체 관광을 갔다가 할아버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점심 디저트로 나온 떡을 싹쓸이해 받아오는 기염을 토한다. 함께한 세월이 거의 반세기. 이쯤 되면 엄마와 아빠의 부부 싸움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여서 알고도 져주고, 알면서도 승리감을 만끽한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이 그토록 대단하다는 사실을. 다만 그 딸이 안다. 단순한 흑백 펜화와 간결한 문장. 그것만으로 철부지 딸이었던 마스다 미리는 엄마와 아빠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다. 중요한 건 그거다. 만보기를 차고 팔을 휘저으며 동네를 걷는 아줌마, 아저씨도 누군가에겐 세상의 중심이고, 그 삶은 어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는 것.

마스다 미리는 그런 사람이다. 커다란 자석을 휘두르며 세상에 묻힌 갑남을녀에게 그들만의 자기장을 만들어준다. 그 자기장 안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 된다.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