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설에 혀를 담그고 있으면 나를 취하게 만들고 뼈를 덥혀준다. 그런데 자신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치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자위 행위 같은 것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니 나는 문학청년들에 대해 엄청난 편견을 지녀왔던 것이다.” 이 바로 앞대목에서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인간은 도약하지 못할 때 쓰는 것이리라.”
이야기꾼이 되기, 거짓말을 만들기, 환상 속에 살기, 꿈을 현실로 만들기. 구라하시 유미코의 <성소녀>는 이야기를 둘러싼 남녀의 괴이쩍은 체험담이다. 미키라는 젊은 여자가 교통사고를 내고 기억을 잃어버리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사망. 기억을 잃은 그녀가 약혼자인 ‘나’에게 건넨 글에는 ‘파파’라고 부르던 엄마의 옛 연인과 애인으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음을 낱낱이 고백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나’쪽도 별로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간은 아닌데, 친구들과 어울려 여학생을 집단강간한 일이 있다. <성소녀>는 ‘파파’라는 남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며 미키의 기억상실은 진짜인지 아닌지, 그리고 미키와 ‘나’의 약혼은 어떻게 끝날지를 그려간다. 파국은 없다. 갑작스런 죽음은 파국이 아니다. 구라하시 유미코는 놀라운 감각으로 파국을 일상적인 어떤 장면들로 치환해 보여준다. 그러니까 지옥은 이 생에 있다. “마침내 파파는 엄마를 한 조각상처럼 다루게 되었고 저를 포함하여, 가정은 지극히 평안했습니다. 파파는 경멸에서 오는 상냥함으로, 엄마는 불모의 자기억압으로 근사한 균형을 잡고있음을 어린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뻘인 남자, 그것도 엄마의 옛 남자를 열렬히 욕망하는 젊은 여자 미키(처음에 등장할 때는 16살이다).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애초에 영혼의 교류가 아니기 때문에 섹스에 대한 묘사도 제법 있지만 이 책에서 정말 외설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대목들은 근친상간의 암시가 있는 ‘파파’와 미키의 관계가 아니라 구라하시 유미코가 바라본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들이다. “정신병원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미키는 결혼 속에 자신의 주검을 유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안보’(1960~7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안보투쟁) 이후엔 혁명놀이에서 예술놀이로 옮아간 ‘아방가르드 원숭이’가 눈에 띄곤 했다.”
귀가 솔깃할 만한 충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열여섯살 여성의 목소리로 꿈꾸듯 읊는 ‘아저씨 로맨스’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초•중반을 넘기고 나면,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아슬아슬 오가며 독자를 유혹하는 구라하시 유미코의 문장에 홀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남들 보기에 그저 좋아 보이는 삶의 얼굴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맨 얼굴에 대한 과감한 상상과 묘사.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온갖 일을 겪고 이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는 이의 음전한 미소.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