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순간에 지다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일러스트레이션) 2014-11-13

<보이후드>를 보고 시간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다

올해로 4년째 ‘1일 1초’ 비디오를 찍고 있다. 휴대전화기로 매일 찍은 동영상 중에서 오늘을 가장 잘 보여주는 ‘1초’를 선정한 다음 그걸 이어 붙이는 방식이다. 별것 아닌 영상들이다. 사람을 찍을 때도 있고, 하늘을 찍을 때도 있고, 바람이나 빗줄기를 찍을 때도 있다. 별거 아닌 영상들이지만 1년이 365초로 간략하게 압축된다. 10년쯤 찍은 다음 3650초를 한꺼번에 이어서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지루한 예술영화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동영상 일기장 같을 것이다.

1일 1초 프로젝트는 독창적인 기획은 아니다. 누가 제일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고, 나 역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1초씩 찍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계속 찍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1초로 영상을 만드니까 나는 0.5초로 해볼까 아니면 좀더 길게 2초로 해볼까’ 처음엔 고민을 했는데, 결론은 역시 1초였다. 0.5초는 너무 짧았고 2초는 너무 길었다. 1초는 묘한 시간이다.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지나치게 짧은 시간은 아니다. 적당한 순간이고 절묘한 시간이다. 똑, 딱, 하는 사이로 우리는 어마어마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알려졌듯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는 12년 동안의 기획이다. 같은 사람들이 1년에 한번씩 만나 12년 동안 영화를 찍었다. 참으로 무모해서 무시무시한 기획이다. 말하자면 ‘1일 1초’ 프로젝트의 블록버스터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보이후드>라는 걸작 영화와 비교한다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형식과 규모는 다르지만 두개의 프로젝트가 도착하는 지점은 비슷하다. 시간은 우리를 어떻게 마모시키는가 혹은,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으려 하는가. 아니, 그럼에도 시간은 어떻게 달아나는가, 아니, 결국, 기억은 시간의 부스러기일 뿐인가. 우리가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착각일 뿐, 우리는 가만히 서 있고 시간이 우리의 곁에서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는 절대 시간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 시간의 앞모습과 마주할 수 없다.

가끔 예전에 찍은 1초 영상을 볼 때가 있다. 1초의 순간은 선명하다. 영상을 찍은 내가 보이고, 풍경과 사건이 기억난다. 1초의 주변은 흐릿하다. 하루 8만6400초 중에서 오직 1초만 선택에서 살아남았을 뿐 주변의 시간들은 점점 흐릿해진다. 곧 암흑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기억 역시 그럴 것이다. 우리에게 선택된 기억들은 끊임없이 재생되고 되풀이되겠지만 주변의 기억들은 서서히 암흑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시간에는 모퉁이가 많아서 우리는 계속 발길을 꺾으며 회전해야 하고, 문득 돌아보면 지나온 길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간에는 애초에 출구 따위도 없다. ‘1일 1초’를 찍기 시작한 후로 시간에 대한 태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간 후에 되살아나는 것이지만 ‘1일 1초’를 찍는 순간 나는 이 화면이 나의 기억이 될 것임을 알고, 나는 기억을 선택한다. 나는 능동적으로 순간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나머지 기억들의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1일 1초’를 촬영하지 않더라도 그런 과정들은 무수히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시간을 맞이하면서 어떤 순간은 의도적으로 기억하고, 어떤 순간은 의도적으로 버렸을 것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를 보면서 화면 속 주인공들의 나머지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보이후드>를 보는 사람들에게 영화 속 시간은 끊임없이 확장되지만 영화를 찍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축소됐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6살 소년에서 출발해 18살이 된 주인공 메이슨 역의 엘라 콜트레인에게 <보이후드>는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영화 속 엘라 콜트레인의 변하는 얼굴을 볼 때마다, 성인이 되어가는 얼굴을 볼 때마다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슬펐다. 긴 시간을 다룬 영화에서는 자막에서 ‘1년 후’라는, 영화 속 시간의 경과를 표시해줄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게 거짓말인 걸 안다. ‘당신도, 나도, 시간이 1년 흘렀다고 칩시다’라는 약속일 뿐이다. 하지만 <보이후드>에는 그런 자막이 없는데도 우리는 엘라 콜트레인의 얼굴을 보며 ‘1년 후’란 걸 안다. 골격이 커지고 얼굴이 길어지고 눈썹이 짙어지고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란다. 영화 속 엘라 콜트레인의 얼굴은 18살에서 멈춘다. 남성의 경우, 성장은 18살에서 멈춘다. 모든 게 완성된 상태에서 영화가 끝나는 셈이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에머슨의 경구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보이후드>는 주인공의 파멸을,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더이상은 보여주지 않는다. 보이후드에 대한, 성장에 대한 영화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하늘 높이 던진 야구공 같은 존재들이다. 끝도 없이 높이, 아주 높이 하늘로 올라가다 어느 순간 정점에서 잠시 머물곤 곧장 아래로 추락한다.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의 패트리샤 아퀘트는 아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내며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라고 소리지르며 운다. 추락을 앞둔 야구공의 고백이다.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누구나 뭔가 더 있을 줄 아니까 사는 거지. 어머니를 떠난 메이슨은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을 빼먹고 친구들과 하이킹을 떠난다. 몇몇 친구는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축복한다. 메이슨은 처음 만난 여자친구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순간을 붙잡으라고 말을 하잖아. 하지만 난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것 같아.” 강을 바라보며 승리를 장담하는 친구들에 비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는 생각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어차피 우리는 순간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야구공이 정점에 오랫동안 있으려면 순간에 점령당하는 수밖에 없다. 시간의 앞모습을 포기해야만 한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새로운 기획이 떠올랐다. 하루에 한 문장씩 10년 동안 소설을 쓰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아니면 <보이후드>처럼 여름휴가 기간에만 소설을 쓰고 10년을 지속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카메라는 이야기와 풍경과 시대를 함께 잡아낼 수 있지만 문장으로도 과연 그게 가능할까. 문장에 동시대를 반영할 수 있을까. 문장의 비유가 시대의 풍경을 낚아챌 수 있을까. 아마도 무척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예술이란 결국 인간과 시간의 협업이라고 가정한다면, <보이후드>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