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3학년 때다. 학교가 일제시대 때 지은 목조건물이라 찬바람 드는 계절이면 그 선연한 냉기에 잔뜩 몸을 움츠려야 했다. 교실에 있는 온기라곤 석탄난로 딱 하나. 담임은 우리를 성적순으로 그 난로 옆에 앉혔다. 성적이 안 좋을수록 난로에서 멀어졌고, 급기야 꼴찌는 뒷문쪽에 앉아 젖은 새처럼 몸을 떨어야 했다. 담임의 말을 기억한다. “공부 못하면 불을 쬘 자격이 없어.”
어찌나 끔찍한 기억인지 다른 담임들 이름은 죄 까먹었는데, 3학년 담임 이름은 평생 흉터마냥 마음자락에 각인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 경북 칠곡초등학교의 급식 뉴스를 접하자마자 단번에 그 기억들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초딩들이 성적순으로 점심 급식을 받는단다. 항상 꼴찌한다는 아이 말이 눈을 찌른다. “전 성적이 안 올라서 1년 내내 꼴찌로 밥을 먹었어요.”
세상은 그렇게 변한 게 없다. 30년 전 난로에서 가장 멀리 앉은 채 불을 쬘 자격을 얻지 못했던 꼴찌와 1년 내내 배고픈 위장을 틀어쥔 채 가장 늦게 밥을 먹어야 했던 칠곡의 꼴찌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아니,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사람들은 칠곡초등학교를 특정화해서 비난하기에 열을 올리지만, 당신들이 살고 있는 곳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광주와 대구 등 남부 7개 지역을 조사한 결과, 거의 모든 곳에서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 관행이 여전했다. 성적과 석차 등을 교내에 공개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산의 모 초등학교는 점심시간 전에 문제를 풀게 해서 푼 순서대로 밥을 먹게 하고 있다.
‘밥이 하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성적순대로 밥을 주는 지금의 이 끔찍한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0년 전 성적순대로 난로 온기에서 멀어졌던 그 아이들은 지금, 초딩들의 부모들이 되어 있을 텐데, 세상은 왜 더욱 암울해지고 있는 건가?
‘선택적 망각’은 인간이 삶의 거친 굴곡을 견디게 하는 자아 방어기제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정체와 퇴행을 낳게 하는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당했던 만큼의 보상을 받기 위해 선택적으로 삭제되는 기억들, 성공이라는 보상을 위해 기꺼이 시야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비극의 실제들.
학교든 군대든, 그 파렴치한 줄 세우기의 상흔들은 지워지기를 반복하며 강산이 세번, 네번 바뀌어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망각과 지움의 정도가 짙어질수록 그 사회는 기억상실증에 빠져 코마에 이르게 되는 바, 서글프게도, 한국은 그렇게 온통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그 욕망의 그래프를 위해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을 모두 망실해버렸다.
부모들의 어리석은 망각 덕분에, 아이들이 성적순대로 줄지어 밥을 먹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이란 이미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