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아이어 감독의 <아이리스>는 영국 작가 아이리스 머독(1919∼1999)의 실제 삶에서 빌려온 이야기다. 감독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희곡과 소설을 통해 자기 세계관을 피력해온 이 위대한 작가의 ‘작품세계’ 대신 사랑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사랑이야기라면 우선 청춘남녀가 떠오를 테지만, 영화는 사랑이 젊은 날의 열정일 뿐 아니라 삶의 긴 여정과도 동행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젊은 날의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는 수면 위를 막 차고 오른 물고기처럼 거침없고 솔직하다. 파티에서 처음 만나 그를 안경 너머로 몰래 지켜보던 존 베일리(휴 본빌)라는 풋내기 영문학 강사는 말도 더듬는 데다 소년처럼 수줍은 발그레한 볼을 지녔다. 독수리나 사슴으로 변해 달아나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처럼 아이리스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분방한 삶을 살지만, 존은 그런 아이리스를 지켜볼 뿐이다.영화는 젊은 날의 이야기와 노년의 이야기를 엇갈려 보여준다.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하게 쌓은 아이리스(주디 덴치)는 어느날 새 작품을 쓰다 지극히 평범한 낱말이 떠오르지 않고, 인터뷰 도중 질문을 잊어버려 말문이 막힌다. 흔히 ‘치매’라 불리는 알츠하이머병이 찾아온 것이다. 작가가 언어능력을 상실한다는 건 아마도 육상선수가 두 다리를 잃어버리는 일만큼이나 치명적일 것이다. “말은 아내의 전부”라 믿었던 존(짐 브로드벤트)은 지금까지 자신의 우상이자 영웅이던 이가 텅빈 소라껍질과 같은 존재로 변해가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한다. 노년의 이야기가 오히려 플래시백이라 느껴질 만큼 추억과 현실이 정교하게 짜여진 이 작품은, 젊음이나 언어 따위의 화려한 수식이 가신 뒤 남은 인간의 사랑이란 어떻게 가능한 건지를 담담하게 탐구한다.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 조연상 수상, 8일 개봉.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