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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영화의 웜홀을 통과하다
장영엽 2014-11-13

<인터스텔라>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하는가

비밀스럽게 봉인되어 있던 블랙홀의 입구가 드디어 열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에 대한 국내외 반응이 뜨겁다. 사실 <인터스텔라>는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메멘토>와 <배트맨> 3부작, <인셉션>의 연이은 성공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어떤 기대감과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신이 스탠리 큐브릭과 리들리 스콧의 영향 아래 놓인 감독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아왔던 놀란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에이리언>이라는 SF 장르의 클래식을 구축한 선배들의 뒤를 따라 마침내 우주를 무대로 한 새로운 오리지널 SF영화를 만든다는 점 또한 팬들의 마음을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비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미국의 유명 물리학자 킵 손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제작진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점들에 대해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은 <인터스텔라>가 우주를 조명하는 방식과 아이디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인터스텔라>는 태생부터 수많은 궁금증과 기대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장엄하고 경건한 우주, 시간의 상대성, 추상의 객관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터스텔라>는 완전한 새로움과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은 아니다. 영화는 많은 장면에서 놀란의 전작 <인셉션>을 떠올리게 하며, 그가 전작들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이 작품은 원작이 따로 없는 오리지널 SF 영화이긴 하지만 이미 우주를 탐험한 바 있는 수많은 선배 영화들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가 공개되기 이전부터 <인터스텔라>의 중요한 레퍼런스로 거론되어왔던 스탠리 큐브릭의 1968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경우 오마주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등장인물, 줄거리, 촬영 등 <인터스텔라>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웜홀에 대한 아이디어는 역시 킵 손이 자문을 맡았던 칼 세이건 원작의 동명 영화 <콘택트>를 닮아 있다(이번 영화를 통해 놀란의 페르소나로 처음 거듭난 매튜 매커너헤이가 <콘택트>의 주인공 엘리(조디 포스터)와 설전을 벌이던 독실한 크리스천 팔머를 연기한 배우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인터스텔라>를 보며 과거 우리가 사랑했던 우주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건 SF영화의 열렬한 팬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한때 <인터스텔라> 프로젝트에 몸담았던 스필버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놀란은 <미지와의 조우> 같은 영화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했던 경이로움과 설렘을 자신의 영화에 이식하길 바랐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인 쿠퍼(매튜 매커너헤이)는 더이상 생존을 위한 영역 너머에 위치한 것들에 대해 무심한 미래의 지구인을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데, 그건 이 영화를 만든 놀란의 의도와도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모두 우리의 본질을 잊은 것 같아. 우린 탐험가이자 개척자였는데.”

<인터스텔라>는 자원 고갈로 멸종의 위기에 처한 미래의 지구를 조명한다. 한때 파일럿이었으나 지금은 논밭을 일구며 홀로 아들딸을 키우는 남자 쿠퍼가 있다. 그는 어느 날 딸 머피(매켄지 포이)의 방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떨어진 책들, 딸의 방에 쌓인 모래의 모양으로부터 이진법으로 암호화된 좌표를 발견한 쿠퍼는 좌표가 향하는 곳에서 나사(NASA)의 옛 동료들과 조우한다. 그곳에서 만난 그의 스승 브랜드 박사(마이클 케인)는 쿠퍼에게 인류와 사랑하는 딸의 생존을 위해 지구를 대신할 행성을 찾아 우주로 떠나라고 말한다. 브랜드 박사의 딸 아멜리아(앤 해서웨이)와 동료 로밀리, 도일, 인공지능 로봇 타스가 그의 여정에 동행하는데, 탐사를 계속할수록 그들에겐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인터스텔라>의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언급되어왔던 건, 영화사상 가장 치밀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었다는 블랙홀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자문을 맡았으며 ‘시공간의 웜홀과 성간여행에서의 그 유용’ 등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물리학자 킵 손은 유튜브에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으로 탄생한 <인터스텔라> 속 블랙홀의 생성과정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과적인 지식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가 구현해낸 우주의 모습은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거나 칼 세이건의 과학도서를 원작으로 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관람하는 느낌을 종종 받게 한다. 한스 짐머의 웅장한 음악이 이따금 멈추고, 영화가 익스트림 롱숏으로 고요하고 광활한 우주를 조명할 때의 감흥은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영화나 특수효과로 점철된 여타의 우주영화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경건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70mm 아이맥스 촬영은 이처럼 별다른 과장 없이 담백하고 스트레이트하게 조명한 우주의 공간감을 살리는 데 일조한다. 리얼리티에 충실하게 우주 장면을 재현하는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시간’의 문제다. 놀란에게 시간을 배열하고 재구성하는 문제는 언제나 중요했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변화라면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상대성 이론’을 활용한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다른 행성에서의 한 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일 수 있다는 <인터스텔라>의 설정은 쿠퍼와 우주인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이자 이 영화에서 가장 몰입도 높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더불어 <인터스텔라>의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초자연적이거나 추상적인,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이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은 ‘유령’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초반부, 자신의 방 안에 잔뜩 떨어져 있는 책을 보며 유령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딸에게 쿠퍼는 이렇게 말한다. “유령이라고 무서워할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면 정답은 나오게 되어 있어.” 다시 말해 <인터스텔라>에서 중요한 건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무언가를 규명하려는 시도이자, 추상적인 존재를 객관적인 무언가로 치환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것은 과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주 탐사와 더불어 유령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을 다루는 놀란의 방식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복잡한 전개를 띠고 있으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예측 가능한 변수의 결말

문제는 참신한 이론과 웅장한 스케일로 무장한 이 영화의 결말이 다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단 하나의 변수가 정교한 방정식을 끝맺지 못하게 하듯, 가족과 사랑의 중요성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인터스텔라>의 후반부가 이 영화의 과학적인 진중함과 맞물려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 장대한 우주영화는, 지금 현재 가장 촉망받는 미국 감독과 과학이론의 현재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라는 욕망. <인터스텔라>는 이 욕망에 대한 놀란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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