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encounter reality”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2014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TIDF)가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지난 10월9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되었다. 다큐멘터리 장르 자체의 존재론적 특징이 현실과의 만남일진대 현실과 다시 마주하자고 외치는 TIDF의 속내가 궁금했다. 1998년 첫 항해를 시작한 이후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시점에 직면한 TIDF.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이 영화제 또한 흔들리지 않고 지켜야 할 중심 가치를 현실에서 찾겠다는 다짐이 영화제 슬로건에 배어 있었다.
그동안 대만의 중서부 도시 타이중(臺中)에서 민간영화단체 중심으로 진행하던 영화제가 9회째를 맞이하면서 대만영화진흥위원회(Taiwan Film Institute)와 손잡고 타이베이로 개최 장소를 옮겼다. 정부기관의 지원으로 영화제의 규모가 대폭 커졌는데, 134편의 초청작품과 6개의 상영관,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연구자가 참여하는 10여개의 전문가 포럼이 관객을 맞이했다. 비엔날레 방식으로 개최하던 영화제가 앞으로는 매년 열릴 예정이라니,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물론 대만 다큐멘터리 관객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올해의 TIDF는 아시아권 다큐멘터리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목받았다. 아시아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오가와 신스케 감독 회고전과 특별 대담,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현황을 짚어보는 세미나,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는 포럼과 더불어 아시아비전경쟁, 대만국내경쟁, 중국 독립다큐멘터리 특별섹션이 아시아 다큐멘터리가 교류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맡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SIDOF)이 해외작품 프로그래밍 차원에서 첫 방문한 올해의 TIDF는 무엇보다 대만을 보는 또 하나의 창(窓)이자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대만의 오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제 사무국장 W. U. 벨린의 설명에 따르면, 대만에는 제도권과 구획되는 ‘인디’(indie) 다큐멘터리 그룹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는 자체가 상업영화는 물론 TV 방송과의 변별점이며, 그렇기에 다큐멘터리 제작자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정부와 권력기관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으며,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영화적 노력이 돋보이는 대만 다큐멘터리의 경향성을 2014 TIDF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실 폭로2: 국가 기관>(Unveil the Truth2: State Apparatus)은 전직 텔레비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케빈 리 감독이 조류인플루엔자의 발병 사실을 숨겨온 대만 정부를 상대로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만판 마이클 무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케빈 리 감독의 활약은 종횡무진, 에너지가 넘친다. 정부쪽 전문기관 관계자보다 더욱 철저한 자료조사로 행정 관료의 변명을 반박하는가 하면, 인플루엔자로 죽은 닭을 관계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8년간의 힘겨운 노고 덕분일까, 감독의 주장대로 정부는 조류인플루엔자 발병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자는 사임한다. 정부기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가 또 다른 정부기관이 지원하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상황을 보며,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해프닝이 오버랩되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과 사회의 급격한 민주화, 보수와 진보정권의 교체 등 굴곡진 대만의 현대사는 한국과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 그런 연유인지, <진실 폭로2…>가 증언하는 대만의 사회상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대만 정부를 직접 겨냥한 날선 비판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과 <불법 약물>(Black)에서도 돋보였다. 2008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이 재집권하면서 혼란에 빠진 대만 사회. 계엄령이 다시 대두하고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대다수 국민이 정부의 조치에 빠르게 순응해간다. <시민 불복종>은 급격히 보수화되는 대만 정부에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는 시민운동과 연대해 그 실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대만 비디오 액티비즘의 최전선에서 제작된 <시민 불복종>은 비록 영화적으로는 다소 거칠고 불친절하지만, 대만 시민들이 겪는 사회적 혼란을 민중의 편에서 기록한 참여 지향적 다큐멘터리를 대표한다.
<불법 약물>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다. 2013년 한해 동안 대만 사회는 식품안전 문제로 큰 홍역을 치렀다. 이때 주로 논란이 되었던 음식물은 우유와 푸딩 같은 식료품이었다. 그렇다면 대만의 주식인 쌀은 과연 안전할까? 산업화의 물결 속에 도시 인근의 농지 주변에는 큰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배출된 오폐수로 농업용수는 시꺼멓게 썩어 보기에도 역겨울 정도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큰 문제가 없다며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농부는 생존을 위해 농사는 짓지만 자신이 경작한 쌀은 절대 먹지 않는다. <불법 약물>의 카메라는 농부와 행정 당국 책임자, 오폐수 전문가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환경 파괴를 멈추자고 호소한다.
대만의 오늘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작품은 <4891>이다. 설명과 설득을 배제한 <4891>은 기차역, 버스터미널, 사찰, 육교 등 대만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노숙자의 일상을 충실히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세계 16위권의 국가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불평등 해소에 실패한 정부는 노숙자를 보살피기보다는 곳곳에 CCTV를 설치해 그들을 감시하는 데만 전념한다. 일종의 디스토피아와도 같은 대만의 어두운 현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4891> 제작진은 노숙인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장 중심을 지향하는 황팅푸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과 현장 기록의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만 사회의 변방에 주목한 다큐멘터리도 눈에 띄었는데, 18세기 말엽 인도로 넘어가 영국 식민지를 경험하고 콜카타 지역에 중국인 공동체를 형성한 인도 내 중국인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한 <From Border to Border>, 대만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남아시아로부터 이주한 여성들의 관점에서 대만 사회를 바라보는 <Out/Marriage>,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만다린어를 구사할 수 없어 왕따를 당했으나 독학을 통해 전통 타이완 언어와 지역문화사를 가르치는 시골 독거노인의 일상을 담은 <Stray Dog> 등 대만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낸 작가군이 대만 다큐멘터리의 또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그 밖에 예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도 이채로웠다. 시각예술과 행위예술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성 예술인 슈쑤천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담담히 담아낸 <Death of a Female Artist>, 대나무 설치예술가로 유명한 산골 마을 출신 왕원치의 예술관과 작업과정을 완성도 높게 묘사한 <Mountain Spirits>, 그리고 대만을 대표하는 안무가 린리천의 삶과 무용세계를 예술성 높게 조명한 <The Walkers>에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업을 아카이빙하는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시아와 중국어권 다큐멘터리가 교류하고 대화하는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TIDF. 마침 한국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감독 홍리경)이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팔당 사람들>(감독 고은진)이 아시아비전경쟁에서 우수상을, 그리고 <철의 꿈>(감독 박경근)이 작가시선상을 수상함에 따라 한국과 대만의 다큐멘터리 교류가 더욱 진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내년 3월에 막을 올릴 2015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대만 다큐멘터리의 경향성을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