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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시스템 오류
김곡(영화감독) 2014-10-31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해럴드 로이드가 창조한 웃음과 부조리에 대해

<황금광 시대>

한때 너무 궁금했다. 우린 개새끼 소새끼 입에 달고 살지만, 정말 사람과 개새끼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새끼도 먹고 싸고 교미하는 것처럼, 사람도 먹고 싸고 교미하는데. 심지어 개새끼도 아파하고 사랑한다. 사람도 아파하고 사랑한다. 지금까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사람은 웃는데, 개새끼는 못 웃는다는 것이다(물론 개죽이 열외). 하지만 질문은 계속된다. 그러면 왜 사람은 웃을까? 왜 사람만 웃을까? 아직 이 질문에 근본적인 해답은 얻질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근사치에 가까운 깨달음들은 있었노니. 웃음의 핵심은 실수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새끼에겐 그럴듯한 실수가 없다. 개새끼가 지랄하고 넘어지는 건, 엄격한 실수는 아니다. 그건 그냥 개짓이다. 하지만 사람이 지랄하고 넘어지면 그건 실수다. 왜냐하면 그건 개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나. 개에게는 해야 할 짓과 하지 말아야 할 짓이 따로 없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실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겐 따라야 할 규칙체계/시스템이 있으니 실수도 있다. 실제로 독자적인 실수란 없다. 실수가 있다면 그 뒤엔 항상 시스템이라는 환경이 있다. 길 가다가 혼자 넘어져도 거기엔 ‘길거리’(집과 바깥의 구분, 차도와 보도의 구분)라는 시스템이 있다. 만약 넘어진 것이 웃기다면, 그건 그곳이 길거리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치가 차도로 넘어졌다면, 그래서 마침 지나가던 쓰레기차에 치였다면, 더 웃길 수도 있다. 아마 그 쓰레기차를 피하려고 다시 한번 몸을 날렸는데, 이번엔 반대편에서 오던 똥차에 치였다면, 더 웃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실수가 배가되고, 시스템이 그에게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실수가 만약 웃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 필살의 삼단논법: 시스템이 없으면 실수가 없고, 실수가 없으면 웃음도 없다. 고로 시스템은 웃음의 전제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채플린

나 같은 중생은 삼단논법까지 동원해가며 논증해야 하는 이 깨달음을, 온몸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이미 깨닫고 계셨던 분들은, 다름 아닌 코미디 작가들이다. 지금은 클래식 아이콘이 되어버려서 마음속 박물관에 고이 간직해놓고는 다들 안심하고 마는, 그래서 인문학에 있어서 <자본론>과 같은 위상(다들 알지만 아무도 실제로 읽지는 않은!)에 박제화되어버린 채플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실제로 채플린이 웃긴 것은 단지 그가 뒤뚱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엉뚱한 곳에서, 즉 그리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그리하기 때문에 웃기다. 넘어져도 무도회장에서 넘어져야 웃기며, 놀아도 전쟁터에서 놀아야 웃기며, 도망가도 링 위에서 도망가야 웃기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았다. 실제로 채플린은, 자신과 같은 비천한 존재가 섞일 수가 없는 곳만 일생 찾아다녔다. 대부분 그것은 고상한 부르주아들의 세계이거나, 아니면 자기 같은 약골이 버틸 수 없는 전쟁터다. 그는 자신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찾아다닌 거다. 아무리 고립되어도 시스템은 계속 이어진다. 사지로 인간들을 몰아넣고 또 고립시키는 시스템(대공황)이 있는 것이다.

<황금광 시대>는 금맥을 찾아 떠난 자들의 이야기이고, 일확천금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아아, 아직도 기억난다. <황금광 시대>에서 폭설에 갇힌 채 몇날 며칠을 굶던 채플린이 구두를 삶아서 먹던 장면이! 오두막이 절벽 끝에 걸려서 중심을 잡으며 아슬아슬하게 시소를 타던 그 장면이! 사람들이 아등바등 지랄할수록, 발버둥치면서 고꾸라지고 내동댕이쳐질수록, 그들을 그리로 몰아넣은 시스템이 더 본새를 드러낸다. <모던 타임즈>가 아직도 걸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채플린이 바로 그 시스템을 자본주의라고 특정하면서도, 그 특유의 유머를 증폭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춤을 추는 것은, 컨베이어 벨트와 톱니바퀴의 장단에 맞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해괴망측하면서도 시대정신을 한방에 압축하는 유머인가! 말하자면 장단 맞추다가 북 찢어진다. 시스템이 장단이고, 북이 사람이고, 찢어짐이 바로 실수다. 채플린이 후배들에게 길이 남긴, 광대의 본분: 광대란 장단을 폭로하기 위해 일부러 찢어지는 북이다. 광대는 일부러 실수함으로써 시스템을 드러낸다. 채플린에 따르면 희극의 정신은 귀류법이다. 오류가 전제의 모순을 보여주듯, 실수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제너럴>

채플린과 키튼의 차이는 이소룡과 성룡의 차이

아마도 채플린과 가장 많이 비교되었지만, 사실은 가장 대척점에 있는 코미디 작가는 버스터 키튼일 것이다. 채플린이 시스템에 인간을 대립시키는 반면, 키튼은 인간을 시스템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 그것은- 크루즈 미사일처럼 자동운행되는 집, 제동장치를 잃어버린 폭주기관차, 항로를 이탈한 함선과 같은- 고삐 풀린 거대 기계라는 시스템이다(<제너럴> <항해사>). 키튼은 뛰고 점프하고 또 건너뜀으로써, 그 시스템의 결속되어 있던 부분들을 연결하고, 끊어져 있던 구간을 단번에 이어버린다. 키튼은 인간을 미친 기계의 미친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채플린이 가장- 정치적으로- 반대하고자 한 대목 아닌가. 요컨대 채플린에게 시스템 속 인간은 불량품 신세였고, 이것은 비판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던 반면, 키튼에게 시스템 속 인간은 부속품의 운명이었고, 이것은 차라리 환영받고 고무되어야 했던 거다. 채플린과 키튼의 차이는- 사람들의 통념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차이도, 슈퍼맨과 배트맨의 차이도,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차이도, 타르코프스키와 앙겔로풀로 스의 차이도, 김한길과 안철수의 차이(?)도 아니다. 채플린과 키튼의 차이는, 이소룡과 성룡의 차이다. 채플린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거라면, 키튼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춤을 춘다. 그리고 키튼에게 그 지형지물이야말로 끊임없이 조립해가야 하는 부속들의 원천이었던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키튼의 영화에는 실수가 딱히 없다. 그에게 실수란 곧 연결, 조립, 접속이기 때문이다. 마치 블록을 조립하듯. 뚝딱뚝딱.

그리고 해럴드 로이드가 있다. 그의 천재성에 비한다면 한참 덜 알려진 작가지만, 영화학교 입문서에 으레 등장하는 ‘한 남자가 시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바로 그의 작품일세(<마침내 안전>). 채플린과 키튼 중간에 끼어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두 작가의 절충점을 이루면서 두 작가가 추구했던 극한점을 동시에 취하는 천외천 균형감을 보유한다고 말하면, 과장인가. 로이드가 다루는 시스템은 도시생활에서 으레 나타나는 복잡다단한 회로, 혹은 과부하된 회로들(교통 체계, 교환 체계, 신호 체계 등)이다. 통신량이 많으면 업데이트 속도가 느려지듯, 과부하된 회로는 언제나 오작동과 오신호와 같은 불량품을 낳기 마련이다. 로이드의 유머는 바로 이러한 오작동을 버텨내는 오기, 똘기, 객기(심지어 역이용하는 데)에 있다. 공인 줄 알고 모자를 들고 뛰는 럭비 선수(<신입생>), 질주하는 마차를 감속하기도 하고 가속하기도 하는 마네킹(<스피디>) 등등이 바로 그 오작동 광대들이다. 물론 가장 멋진 오작동은 <마침내 안전>의 유명한 빌딩벽 기어오르기 장면이다. 여자친구 앞에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 기어오르는 백화점은, 각 층이 하나의 채널이 되어 시시각각 오작동되는 거대 회로가 된다. 채플린의 실수는 로이드에겐 오작동이며, 키튼의 접속은 로이드에겐 버퍼링인 셈이다(그래서 로이드의 웃음은 언제나 한 박자 늦다. 스릴과 함께 유머가 오기 때문이다).

<스피디>

인간의 실수를 보완하기 위해서 만든 시스템

위대한 광대들은 웃음만을 추출하지 않는다. 그들은 웃음 속에 내재된 비참, 슬픔, 부조리를 추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에 대한 냉소와 조소이기도 하다. 채플린, 로이드(심지어 키튼마저도)는 시스템을 비웃고자 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시스템은 인간의 실수를 방관, 방치, 방조하고 심지어 실수들을 양산해내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모던 타임즈>에 등장하는 식사 기계처럼). 그렇다면 그들이 끝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실수를 보완하는 것이 시스템의 본래 임무’라는 진실 아닐까. 그래서 ‘인간의 실수를 방조하고 심지어 양산해내는 시스템이 더 슬픈’ 현실 아닐까. 인간이 본능과 욕망을 따라가다 실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시스템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진실. 최근 판교 환풍구 추락 사고에 대해서 “환풍구에 올라간 사람들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일찍이 광대들도 깨달았던 이 사소한 진실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이 “그러게 거길 왜 올라갔니”라고 말할 때, 그들은 “시스템은 원래 믿을 것이 못 되니 알아서 조심하라”고 말하는 셈, “시스템은 원래 너의 실수를 보완해줄 아무런 용의도 의무도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시스템의 기원과 임무에 대한 무지를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자들이다(세금은 내면서 아깝지도 않은가? 법질서 준수를 외치는 건 자아분열인가?). 그들의 무지는 채플린, 키튼, 로이드의 유머를 다 합쳐도 못 이길 정도로, 우습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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