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나 사물에 움직임을 주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움직임은 애니메이션의 본질이다. 이때 움직임을 추동하는 바탕에는 논리적인 연관관계 이전에 상상력이 우선시된다.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PISAF)이 국내외 유일한 ‘학생’ 영화제를 표방한 것은 말랑말랑한 두뇌에 담긴 상상력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높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로 16회를 맞은 PISAF가 10월22일(수)부터 26일(일)까지 5일간 한국만화박물관과 부천시청에서 열린다. 올해의 주제는 ‘애니 클라우드’다. 클라우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수많은 서버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저장소를 공유하는 컴퓨팅 기술을 뜻하는 말로서, 세계의 애니메이션을 한자리에 모으고 이를 공유하는 축제의 본디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움직임 자체만으로 눈을 사로잡는 단순한 형태의 작품부터 내러티브가 두드러지는 작품까지 다양한 상영작이 마련된 가운데 <우당탕 마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스테판 오비에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명가 라이카(LAIKA)가 제작한 개막작 <박스트롤>과 관련한 특별 전시프로그램 등 감상에 깊이를 더할 부대행사도 마련되어 있으니 챙겨보길 권한다.
<쿠! 킨-자-자> Koo! Kin-Dza-Dza 게오르기 다넬리야, 타티아나 일리나 / 러시아 / 2013년 / 90분
제목만큼이나 기이한, 러시아발 SF물. 유명 첼리스트 블리디미르와 젊은 DJ 톨릭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내민 장치의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플루크 행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순간이동한다. 플루크 행성은 바지의 색깔로 계급을 분류하고, 불을 가장 중시하는 등 나름의 규칙이 있는 곳. 이 작품은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이 자신의 실험적인 SF인 <킨-자-자>(1986)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킨-자-자’는 은하계의 이름이고, ‘쿠’는 특정 단어를 제외한 ‘다른 모든 단어’를 뜻하는 포괄적이고 방대한 단어다. 사막을 연상시키는 플루크 행성은 SF 하면 흔히 연상되는 풍경과 확연히 다르다. 그 세계는 버려진 고철들의 세계인데, 분위기와 캐릭터에서는 셰인 에커의 <나인>이 연상된다.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던 고철들의 소음과 첼로 선율이 어딘가 비슷하게 들려올 때 느껴지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2013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수상작.
<루루> Wolfy, the Incredible Secret 고레고와르 솔로타레프, 에릭 오몽드 /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 2013년 / 80분
늑대 루루와 토끼 톰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다. 고아로 자란 루루는 자신의 엄마가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란 믿음으로 톰과 함께 늑대의 나라 울펜버그로 길을 떠난다. 울펜버그성은 마치 중세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계급사회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동물을 사냥하는 잔혹한 축제로 인해 루루와 톰은 위험에 빠진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중간자적 캐릭터를 바탕으로 동물성과 식물성을 대립시키는 동시에 톰과 루루의 우정을 수직적인 계급성의 반대 자리에 놓는다. 순한 늑대 루루는 감독 고레고와르 솔로타레프가 1984년 개발한 캐릭터로 <루루>(2003)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난 바 있다. 2014 세자르영화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수상작.
<화산고래> Crimson Whale 박혜미 / 한국 / 2014년 / 70분
폐허가 된 2070년 부산 해운대를 배경으로 한 SF. 고아 하진은 마약상 노릇을 하다 경찰에 체포된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하진은 외팔이 여자 백상원의 제안으로 기형 고래에 맞서는 해적단에 합류한다. 부산 해운대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역을 SF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흥미롭다. 기본적인 서사 구조가 <괴물>을 연상시키는데 어쩌면 <괴물>의 소년, 소녀가 살아남는 것을 가정한 이야기로도 보인다. 화산섬에 사는 괴물 고래는 하진과 상원의 개인적인 트라우마이자 시대적인 트라우마의 응축물임을 암시한다. 헤어날 길 없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끝끝내 유토피아를 꿈꾸는 작품이다.
<창백한 얼굴들> On the White Planet 허범욱 / 한국 / 2014년 / 73분
색채가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깔있는 인간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스스로를 괴물로 알고 자란 유색인 민재는 실제로도 끔찍한 괴물이 된다. 그는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경찰까지 살해한 도망자다. 그런 그에게 4인의 무색인 무리가 결탁의 손을 내민다. 영화의 시작은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피를 얼굴에 마구 묻히는 민재의 모습에서 출발하는데, 이때 무색인의 피 역시 무채색이다. 민재의 행동의 이유를 이미지로 설명하는 셈이다. 주인공이 도주하는 것을 측면 롱숏으로 보여주는 장면의 리듬이 특히 인상적이다. 흑백으로만 된 세계는 수묵담채화의 동양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며 간략한 표현 방식은 그림자 극을 연상시킨다. 색깔론이 여전한 한국의 현실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달사람> Moon Man 스테판 셰쉬 / 독일 / 2012년 / 95분
달에서 살던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보름달 위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린다. 아이들만이 그의 존재를 안다. 아이들은 그를 달사람이라 부른다. 어느 날 달사람이 사라진다. 달을 향해 날아드는 행성을 피하려다 우연히 지구에 불시착한 것. 달사람이 사라진 뒤 아이들은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른한 밤의 무드가 영화 전반을 무겁게 누르는 가운데 무엇보다 달뜬 밤 풍경이 눈부시다. 지구의 풍경과 달의 풍경을 서로 조응하게 한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장면별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곳곳에 활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Moon River>(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삽입곡),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영화 <이터널 선샤인> 삽입곡) 등 영화팬들에게 익숙할 만한 곡도 등장해 귀를 즐겁게 한다.
<우당탕 마을-크리스마스 로그> A Town Called Panic-Christmas Log 스테판 오비에, 뱅상 파타 /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 2014년 / 26분
<극장판 우당탕 마을> A Town Called Panic 스테판 오비에, 뱅상 파타 /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 2009년 / 75분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우당탕 마을> 시리즈의 최신판과 극장판이 나란히 선보인다. 한집에 사는 카우보이, 말, 인디언의 투닥거리는 소동극은 언제 봐도 중독성이 강하다. 실수 연발 허당 커플, 카우보이와 인디언때문에 말은 늘 뒷수습하기 바쁘다. <크리스마스 로그>는 카우보이와 인디언이 실수로 말이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망치면서 벌어지는 소동이고, <극장판 우당탕 마을>은 역시 두 사람이 말의 생일선물을 준비하다가 실수로 벽돌 50만개를 주문한 황당한 사건을 다룬다. 조악한 장난감 피겨를 연상시키는 클레이애니메이션으로, 주인공들의 움직임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제한된 움직임은 이 영화의 한계가 아닌 매력 요소다. 제한된 움직임을 보완하듯 끊임없이 재잘대는 수다와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상황이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극장판 우당탕 마을>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바 있다.
2014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수상작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단편 수상작을 모아 볼 기회가 마련된다. 단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정다희 감독의 <의자 위의 남자>는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던 남자가 문득 ‘이 방이 내 상상 속에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생각이 깊어지는 양상을 수축이 아닌, ‘나’의 팽창으로 시각화한 지점이 흥미롭다. <패치>는 검은색과 흰색의 농도를 조절한 네모판의 배치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형상의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인지 사이의 간극을 실험하고 싶었다는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저 한편의 마술 같다는 생각이 든다. 휴지 한장이 얼마나 많은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휴지 애니멀, 네피아> 역시 그와 비슷한 놀라움을 안겨준다. <하스타 산티아고>는 배낭을 멘 한 남자의 순례 행로를 따라간다. 인물이 걷는 것을 보고 있으면 풍경이 인물을 지나는 듯 느껴진다. 여행자의 동작에 반응하는 식물들의 움직임을 재치 있게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