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를 인터뷰하는 건 오래된 사전을 뒤적거리는 일과 비슷하다. 그녀는 한번에 ‘이것’이라고 단정지어 답하는 법이 없다. 처음 도전하는 스릴러 장르가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쉽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액션 연기가 육체적으로 버겁지 않았냐는 질문에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렵다’와 ‘쉽지 않다’ 사이에 놓일 수 있는 방대한 행간을 읽지 못하는 이는 그녀의 대답을 무성의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그녀를 직접 대면해본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려 갖은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대충 기계적으로 답변을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텐데 단어 하나라도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쉽게 내뱉지 못하는 그녀는 검색어를 치면 답이 툭 튀어나오는 전자사전이 아니라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며 앞뒤 아래위 단어까지 함께 읽게 되는 오래된 사전 같다. 익숙한 울림들 사이, 정유미라는 행간을 제대로 읽어나가는 길목에서 ‘내 이웃 같은 정유미’를 발견한다.
-드라마 <연애의 발견> 촬영이 한창이라 정신없겠다. =몸은 힘들지만 재밌다. 드라마는 잠을 푹 잘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 물리적으로는 힘들지만 한번에 몰아쳐 푹 빠졌다 나올 수 있어서 좋다. 반응을 챙겨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기사가 너무 많아서 다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것 같아 힘이 난다.
-지난해 영화 <우리 선희>부터 <깡철이>, 끝나고 바로 드라마 <직장의 신> 그리고 이번 영화 <맨홀>, 지금 <연애의 발견>까지 정말 쉴 틈 없이 달리고 있는데.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한 건 아닌데. 중간에 잠깐 쉬기도 하고 여행도 다녀왔고. 막상 할 때는 모른다. 가끔 뒤돌아보면서 ‘아, 이만큼 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좋은 영화들로 시작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실 시나리오는 꾸준히 들어오지만 전부 성에 차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다. 동시에 한편으론 들어오는 대로만 영화를 찍거나 지금에 익숙해지는 게 무섭기도 하다. 쉬지 않고 뭐든 하고 싶은 마음과 차분히 길을 고민하는 시간, 늘 그 사이에서 고민해온 것 같다. <맨홀>은 그 와중에 만난, 하고 싶은 영화였다.
-스릴러 장르에 처음 도전하는 영화다. 극중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는데, 어찌보면 의외의 선택이다. =첫 도전, 연기 변신, 이런 생각으로 시작한 영화는 아니다.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역할은 아니다. 뭔가 많이 보여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한번도 없는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한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작품을 하고 있다. <맨홀>에 출연한 건 전적으로 대학 동기인 신재영 감독 때문이다. 경호(<맨홀>의 주연을 맡은 정경호와 정유미는 동갑내기 친구다)는 자기 때문인 줄 알고 있지만. (웃음) 10년 동안 어떤 식으로든 영화를 놓지 않고 작업해온 걸로 안다. 그가 가진 집요함 같은 게 있는데 거기에 끌렸다. 믿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내가 익숙해져서 간과하고 있거나 사그라지고 있을지도 모를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함께 느끼고 싶었다. 이 사람이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상업 영화로 데뷔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에너지가 궁금했다. 실제 영화에서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한번 더 노력해서 옛날처럼 찍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작품이다.
-현장 분위기가 유난히 좋았다고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현장 복은 늘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엔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조명감독, 촬영감독도 모두 학교 동기거나 동갑 친구들이었다. 영화과 다닌다고 모두 감독이 되거나 스탭으로 일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중 몇명이 버티고 버텨 이 자리에서 10년 만에 만난다는 게 신기했다. 상업영화를 찍는 프로의 현장이지만 학교 다닐 때 함께 영화를 찍던 기분이 났다.
-정유미라는 배우가 지닌 가장 큰 힘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 놓여도 일상이라는 공기를 드리운다. 그건 스릴러공포 영화인 <맨홀>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고집? 욕심 같은 게 있다. 그래도 정유미와 김새론이라는 배우가 출연하는데 기대하는 게 있지 않을까. 이들이 나와서 다행이라는 느낌, 분량에 상관없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말로만 자매로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자매가 이런 거구나 하는 순간들을 만들려고 나름 노력했다. 장르영화지만 단순히 ‘우린 자매고 서로를 의지한다’는 기능적인 역할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찍기 전엔 몰랐지만 촬영하면서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 이 정도면 전달이 됐겠구나, 해내서 다행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장면들.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인지. =맨홀에 갇힌 새론을 처음 만나서 포옹하는 장면이다. 아쉽지만 최종 버전에서는 편집되어 볼 수 없을 거다. 완성된 버전에는 ‘얼마나 고생했냐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분만 짧게 나갔더라. 원래는 “빨리 씻고 집에 가자”는 대사가 있었다.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순간, 그 간절함이 묻어나서 좋았다. 사실 진짜 절실한 건 그런 것 같다. 평범한 것. 지금 드라마를 찍느라 정신없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마트 가서 장 보고 영화 보러 가는 거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만 해도 큰 감흥이 없었지만 촬영을 하다보니 감정이 확 다가오더라. 명장면까지는 아니라도 충분히 설득력을 주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연서라는 캐릭터에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은데 편집되어서 아쉽겠다. =섭섭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이해한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다르니까. 여러 한계와 현실적인 사정도 안다. 그래도 아쉬운 건 내가 아무리 어떤 장면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연기한들 결국엔 관객에게는 완성된 영화가 전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간혹 시나리오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을 때가 있다. 정말 아니다 싶을 때는 고집을 피우기도 한다. 어쨌든 가능한 한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 이번 영화의 경우 동생을 잃은 연서의 간절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렇게 편집될 땐 어쩔 수 없지만.
-이번처럼 아쉬운 게 있을 땐 계속 파고드는 편인지. =촬영할 땐 그런데 끝나면 또 빨리 잊는다. 할 때는 집요한 고집 같은 게 있어서 다른 말투의 내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주변에서 놀라기도 하더라. 이번 경우엔 “아니 내가 나 혼자 살자고 이래? 이래야 같이 사는데 왜 그걸 못하게 하냐고” 같은? (웃음) 캐릭터를 의식하기보다는 상황에 집중하는 편이다. 가끔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하게 나온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전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상황, 세팅되는 과정,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의 분위기에 맞게끔 나를 던져버린다. 그때그때의 내가 거기에 있다.
진심을 다해 부딪치고 납득하지 못하면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성미는 연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유미는 현재 그녀의 팬을 자처하는 이라면 위시리스트에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할 드라마 <케세라세라>(2007) 이후 에릭과 7년 만에 재회한 <연애의 발견>에서 로코 여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중이다. 닳고 닳은 연애 이야기를 나도 한번쯤 저랬을 법한 경험담으로 탈바꿈시키는 건 상대와 공감하고, 상황과 공감하고, 보는 이와 공감하려는 그녀의 오래된 태도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습관이 오늘날 ‘내 이웃에 사는 정유미’를 만든 셈이다. 인터뷰 말미 그녀는 “그간 편수는 많았지만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제외하곤 비중 있는 조연이나 여러 주인공 중 하나였다. 드라마는 내가 끌고 가는 역할도 많았는데 영화는 없었다. 굳이 욕심내자면 당장 할 건 아니지만 내가 이끌어가는 영화도 한편 해보고 싶다”고 했다. 1년 전 <우리 선희> 때는 같은 답변 앞에 ‘언젠가는’이란 말을 붙였었다. ‘언젠가는’에서 ‘당장은 아니지만’으로의 변화. 1년 사이 기약 없던 꿈은 어느새 목표를 세운 계획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내 이웃집 친구’를 넘어 정유미라는 계절이 올 것 같은 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