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할 때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의 욕망이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성적으로 욕망하는 아들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신탁을 내린 존재들이 있다. 샐리 비커스는 아들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신화 해석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세 길이 만나는 곳>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중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용하고, 프로이트의 말년을 설명한 뒤, 그 둘을 합친다. 프로이트는 누군가의 방문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그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10년 넘게 훌쩍 건너뛰며 방문객은 자신이 행한 일을 그에게 들려준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두번의 그 악명 높은 신탁이 어떻게 행해졌는지를 듣는다. 그렇게 다시 살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또한 자신에 차,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고자 하고 어떤 진실이든 감당할 수 있다고 믿은 인간의 비극이다. 신이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몇번이고 던져진다.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아기의 의존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투사요.” “‘신’이란 건 자연의 부당함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원시적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오.” 고작 그것일 뿐인데, 거기에 운명을 의탁하니 탈이 난다. 결국 운명은 인간 스스로 만들고 못질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되기 위해 풀어야 했던 스핑크스의 문제 역시 재해석된다. 문제는 이랬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낮에는 두발로 걸으며,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사람, 이었다. 하지만 “그(오이디푸스)는 이 답이 스스로에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소. 너 자신을 알라. 그런 다음 네가 인간임을, 인류의 일원임을 알라. 그리하여 무엇보다 네가 아무것도 모름을, 그리고 네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언제나 네가 정말로 아는 것으로부터 네 주의를 돌리기 위한 수단임을 알라.”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파국이 찾아온다. 소설의 초반부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발췌보다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오이디푸스가 선왕이자 아버지를 살해한 자이며, 어머니의 남편이자 동생들의 아버지임이 밝혀지는 순간은 ‘무서운 침묵’이 서린 압도적인 중량감으로 그려진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가 청한 신탁의 질문을 죽음 직전에야 묻는다. 책이 인용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신이 드러내지도 감추지도 않고 다만 신호를 줄 뿐이라면, 결국 주어졌다고 생각한 신탁은 인간이 읽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해석한 것, 우리가 받아들인 것은 바로 그 독해자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기로 한 것, 그것이 오이디푸스를 둘러싼 신화 해석의 여러 변주가 될 것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리부트
글
이다혜
2014-10-09
<세 길이 만나는 곳> 샐리 비커스 지음 /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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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리부트 <세 길이 만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