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한국 남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왕년에(잘나갔지)…”, “내가 누군지 알아!” 술 취하지 않은 여성 버전은 “내가 소싯적에(예뻤지)…”쯤 될 것이다. 술 없이도 이 표현을 좋아하는 부류가 있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소리치며 매운 라면을 대령하라는 대기업 임원이 그런 경우다. 아니, 술과 성별과 무관하게 그리고 굳이 내뱉지 않아도 속으로 이 말을 다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는 분석할 만한 국어다. 모르는 사람이 길 가다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 가지 반응이 가능하다. “모르겠는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알아야 돼?” “자기도 모르는 걸 왜 남한테 물어봐?” “바쁜데 비키세요.” “아, 고민이세요? 저도 요즘 그게 문제거든요.”
문제는 이 상황이 폭력을 동반할 때다. 몇년 전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 두명이 술에 취해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타하면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심문하여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한분은 운전 중인 택시 기사에게, 한분은 노상 방뇨 중 이를 제지하는 의경에게.
흥미로운 점은 피해자의 반응이 세대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다. 높은 지위의 두 사람은 자기를 몰라봤다는 이유로 기사와 의경을 ‘고발’하러 피해자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매스컴이 몰려오자 60대인 택시 기사는 구타와 차량 훼손으로 ‘그분’을 고소해도 모자랄 판에 “진심으로 몰랐다”고 허리를 굽혀가며 여러 차례 빌면서 진술서도 안 쓰고 ‘도망’가려 했다. 레드 콤플렉스와 권력자의 횡포를 잘 아는 그의 사과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의경은 “모른 게 죄인가요?”라고 했다가 더 맞았다.
최근에는 야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 두 사람이 이 표현을 썼는데 상대가 범상치 않았다(새터민, 세월호 유가족 관련). 이들은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나는 국회의원이라는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중 한명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이 질문(?)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 제목처럼 자기탐구 차원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하고, 세상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단한 사람, 섬싱”인데 “아무것도 아닌, 낫싱” 취급하는 현실에 항거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존재를 타인에게 묻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선언이다. 효과가 없진 않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게 된다. 그/그녀는 자기확인을 폭력으로 구걸하는 사람, 이 땅은 그런 사람이 큰소리치는 사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