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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울림을, 작은 등대를 찾는 시간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4-10-06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펴낸 문학평론가 정홍수

볕 좋은 가을날 서교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도서출판 강을 찾았다.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을 펴낸 정홍수 문학평론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며 책을 펴내고 문학비평으로 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해온 저자의 작업실에 들어섰다. 지상과 지하 사이, 반지층에 자리 잡은 소담한 공간이 퍽 인상적이었다. 지나치게 도드라지지도, 깊이 침잠하지도 않은 중간 지대의 그 공간이 문학과 세계 사이에서 민감한 촉수를 세우고 서 있는 평론가의 집으로 더없이 적합해 보였달까. 문학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 문학을 통해서 삶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그와 마주앉았다. 뜨거운 커피가 식어갈수록 문학을 향한 그의 깊은 연정은 뭉근히 달아올랐다.

-<소설의 고독>(2008) 이후 두 번째 평론집이 세상에 나왔다. =대부분 청탁을 받아서 쓴 글들이다. 그게 어느 정도 모였고 전 직장인 문학동네에서 제안을 해와 묶게 됐다. 책을 내고 보니 그냥 내가 살아온 걸 얘기했구나 싶다. 나는 흔히 말하는 386세대인데 그 세대로서의 회한이 책 곳곳에서 보이더라.

-책머리에서 밝혔듯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2003)의 엔딩곡 가사 일부를 책 제목으로 가져왔다. 그 가사가 평론집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와 닿아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 =술 한잔하고 저 침대(그의 작업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소파 겸 침대)에서 잠을 자고 깬 새벽이었다. 문득 그 가사를 제목으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가사는 ‘흔들리는 사이로’였는데 문학동네 강병선 대표가 ‘로’ 자를 빼자더라. 그렇게 하고 보니 읽기도 더 수월했고 모양도 갖춰졌다. 책 4부에 영화평론은 아니지만 영화에 관한 글을 싣기도 했고, 또 그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시간들을 통과해왔구나 싶어 제목으로 정했다. 삶이 잘 안 풀린다 싶고 답답할 때면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느끼고 그 감동을 되새기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흔들리는 사이 푸른빛’은 그런 순간들이 아닐까. 우리가 삶의 순간순간을 다 누리고 살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못하잖나. 문학작품을 읽거나 영화를 마주하는 그 시간만큼은 그런 순간을 찾고 싶은 거다.

-2006년부터 올해까지 써온 글 중에서 어떤 기준으로 글을 추리고 엮은 건가. =여기 나온 작품들은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비판적인 기준을 세워서 따져 들어가는 비평의 영역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나는 비판적으로 비평을 쓴 적이 별로 없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선생님은 ‘비평은 교묘한 칭찬의 기술’이라고 말씀하셨다. 비평은 좋은 작품에 대한 반응이고 느낌이다. 그런 작품을 만났을 때 비평가도 할 말이 생기고 비평가 자신의 삶이나 실존적 고민이 글 안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 값싼 감흥이 아닌 제대로 된 울림을 주는 대목이 하나라도 있는 작품은 비평을 할 수 있다. 물론 작품에서 좋은 대목을 찾아내는 게 비평가의 일이지만. 좋은 작품은 반드시 그런 지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에필로그는 따로 붙이지 않았고 그 대신 홍상수 감독 영화에 대한 글로 책을 닫았다. =머리말도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 에필로그는. (웃음) 일부러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 뒤를 맺었다. 그게 현재라고 생각했다. 그의 영화는 삶 자체를 던져놓고 같이 공감해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내가 문학을 통해 찾고자 한 것도 <다른나라에서>(2011)의 작은 등대 같은 걸 수 있겠다. ‘홍상수, 허우샤오시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물론 이 명단에 들어갈 작가들은 더 있겠지만 이 리스트를 보면서 ‘저 사람들이 먼저 가 있구나, 나도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작은 등대가 돼준다.

-이번 평론집에는 미발표된 글이 딱 하나 실렸다. ‘기억의 육체-김소진, <자전거 도둑>’이다. =청탁을 받고 쓴 글이었는데 사정상 발표를 못했다. 고민 끝에 넣었다. 소설가 김소진과 나는 서울대 82학번 동기다. 그 친구의 첫 소설집을 당시 내가 일하던 솔 출판사에서 냈고, 마지막 책을 강 출판사에서 냈다. 문학동네에서 일할 때 그의 전집이 기획되기도 했다. 내 등단 평론도 김소진에 관한 것이었다.(1996년 <문학사상>에 평론 ‘허벅지와 흰쥐 그리고 사실의 자리-김소진의 소설 쓰기’를 발표, 평론활동을 시작했다.-편집자) 내가 문학하는 걸 되게 좋아했고 내가 그걸 제대로 못하는 데 안타까워했던 사람이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쓰는 건데 내 글을 정말 보여주고 싶은 친구가 김소진이다. 내게는 의미가 큰 친구다. 흔히 책이 나오면 누구에게 바친다고들 하는데 난 그게 쑥스럽더라. 근데 이번만큼은 김소진에 대해서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그걸 공개적으로 하기는 뭣해서 이렇게 글을 싣고, 책머리에 ‘한 친구가 있었다’고 넣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 테니까.

-작가가 아니라 문학비평가를 택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우리 세대에는 김우창, 김윤식, 김현, 백낙청 선생님들이 계셨다. 쟁쟁한 비평가들의 시대였다. 당시는 비평 그 자체가 하나의 인문학이었고 비평이 정말 높은 곳에 있는 무엇이었다.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하다 보니 내 마음 한구석에서 따라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렇게 터져나온 거다.

-그런 비평의 시대를 지나온 한국문학과 문학비평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것 같은가. =‘<씨네21>이 내 교양서’라고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나는 한국 영화평론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고 본다. 문학평론은 어떻게 보면 억압적인 글쓰기다. 한국문학이라는 제도 안에 놓여 있다 보니 글쓰기의 틀이 존재한다. 자유롭게 쓰기가 쉽지 않은 거다. 반면 영화평론은 대중과의 소통력도 뛰어나고 내용도 훌륭한 좋은 에세이 같다. 그런 글의 형식이 부럽더라. 최근 문학평론 내에서도 그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신형철 평론가가 대표적이다. 그의 세대의 비평을 보면 기존 비평의 틀에 갇히지 않겠다는 자의식이 보인다. 내용도 좋지만 독자와 소통하는 문제도 생각을 많이 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비평이 문학비평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평론집을 읽다보면 문학을 ‘하다’라는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 같다. 문학이라는 말 뒤에 ‘하다’라는 동사를 강조해 붙인 이유가 있을까. =내게 문학은 실존적인 문제다. 좋은 문학작품, 좋은 영화와 마주했을 때 내 실존이 움직인다. 내 실존이 텍스트와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에는 내가 가장 고양돼 있고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순수한’ 상태라고 할까. 늘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좀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게 문학을 ‘한다’는 의미겠다.

-실존적 차원에서 문학을 하는 일만큼이나 문학의 책무, 문학의 윤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말해왔다. =최근 10여년간의 문학비평에서 문학과 윤리를 잇는 비평 담론이 화두인 것 같다. 80년대는 문학과 운동, 문학과 정치가 곧바로 연결되던 시대였다. 그러다 90년대 접어들어 80년대의 비평 접근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문학은 일상과 욕망, 사적인 것을 다루는 쪽으로 갔고 거대 담론은 사라진 것처럼 말해지는 거다. 하지만 그건 착시였다. 거대 담론은 사라질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걸 다시 불러내는 과정에서 나온 비평 개념이 윤리 같다. 결국 문학이란 개인이 세계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 질문이 좀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던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 한강의 신작 <소년이 온다>는 한국 소설에 이 정도의 힘이 생겼구나 싶은 작품이었다. ‘어째서 친구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나’라는 질문을 작가가 30여년간 가지고 있었고 지금와서라도 묻는 것 아닌가. 그게 문학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비평도 마찬가지로 작품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문학의 위기, 출판 시장의 위기라는 말이 곧잘 회자된다.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어떻게 말하고 싶은가. =2000년대 한국문학을 두고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너무 사사로운 이야기로만 흐른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제 그 과도기는 지나온 것 같다. ‘지금의 이 세계는 뭔가 아닌데?’ 라는 질문을 갖고 있는 한 소설에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문학의 책무를 감당하는 문학이 당연히 나올 거라고도 본다. 좋은 작품이라면 새로운 독자들을 불러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나 성석제 형의 <투명인간> 같은 작품이나, 자기만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확립한 뒤 자유로운 목소리를 얻은 황정은씨를 보면서 한국문학의 힘을 느낀다. ‘문학은 죽었다’ 같은 이름 붙이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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