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을 넘긴 어부 윤우숙. 그녀는 일평생을 순천에서 보냈다. 집 앞에 펼쳐진 순천만에 직접 몸을 담가가며 고기를 잡아 올렸고 그것을 팔아 자식을 건사했으며 일가를 이뤘다. 술 좋아하는 남편이 “꼴 보기 싫”다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은 없다”라며 살뜰히도 남편을 챙긴다. 특별난 것도 없는 삶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라면 으레 그렇게 살아왔을 거라 짐작될 만큼이다. 다큐멘터리 <순천>은 이 범상한 일상을 묵묵히 지켜본다. 그 사이 그녀의 음성이 들린다. “(낡은 고깃배를 보며) 나한테 와서 지도 늙고 나도 늙고.” 고단한 육체노동과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교차한다. 곧이어 카메라는 순천의 너른 갯벌과 그곳의 바다 생물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과 그곳을 둥지 삼아 찾아드는 새떼들을 비춘다.
<순천>은 특별할 것 하나 없다. 이렇다 할 사건도 개성 강한 인물도 없다. 그런데도 <순천>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나간다. 오프닝 시퀀스에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의 ‘순천’(順天)이라는 한자가 찍힐 때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린다. 인간이 제가 서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게 ‘순천’이라면, 그걸 기교 없이 담는 게 <순천>의 몫이다. 카메라가 윤우숙의 일상과 더불어 대자연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다. 개가 새끼를 낳고, 뱀이 알을 품고, 왜가리가 새끼의 부화를 보는 일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닌가. 그때 윤우숙 일가에도 생과 사, 즐거움과 슬픔의 흔적이 지나간다. 내레이션 하나 없이 사람과 자연을 고집스레 담은 <순천>에는 질긴 생명력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