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 <군도: 민란의 시대> <신의 한 수> <역린> <수상한 그녀> <관상> <베를린>의 공통점은?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은 <군도: 민란의 시대>를 제외하면 모두 흥행작이다. 공통적인 건 또 있다. 투자 크레딧에 같은 투자사, 아니 은행 이름이 올라갔다. ‘되는 영화’를 고르는 감식안이 뛰어나고, 그 감식안 덕분에 높은 수익률을 올리며 영화계와 금융계 양쪽에서 최근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다. 기업은행이라면 ‘로 리스크, 로 리턴’을 추구하는 제1금융권이 아닌가. 대체 어떤 이유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특징인 영화 산업에 직접 투자를 하게 됐을까.
제1금융권이 영화 산업에 뛰어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하나은행이 시네마서비스, 로커스홀딩스와 손잡고 ‘하나 시네마 투자신탁 제1호’ 상품을 만들어 당시 시네마서비스가 제작했던 영화에 투자한 바 있다. 최근의 모태펀드를 비롯해 크고 작은 펀드에 은행이 참여한 사례 역시 많다. 하지만 대출, 펀드 조성을 통한 간접투자, 직접투자 등 다양한 자금 조달 방식을 직접 조성해 재무적 투자에 참여한 건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가 처음이다.
재무제표보다 가능성에 주목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가 충무로에 뛰어든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2년. 기업은행은 콘텐츠 분야 전문가 3명을 창투사, 투자배급사 등 외부에서 영입해 은행 내부 금융 전문가와 함께 문화콘텐츠사업팀을 신설했다. 영화, 방송, 게임, 애니메이션 및 캐릭터 사업, 공연 및 음악, 디지털 콘텐츠 등 6개 장르를 대상으로 연 1500억원, 3년간 4500억원 규모의 대출 기금을 마련했다. 당시 문화콘텐츠사업팀 정성희 팀장은 “콘텐츠 산업이 제조업을 비롯해 다른 산업에 비해 수익률이 낮은 데다가 투자 회계가 불투명한 까닭에 사업팀을 꾸릴 때 은행 안팎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문화산업이야말로 미래를 여는 동력 산업’이라는 은행장의 철학과 의지 덕분에 어렵게 꾸릴 수 있었다”고 기업은행이 문화 콘텐츠 사업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했다.
문화 콘텐츠 전문가가 팀에 합류했다지만, 선행학습 없이 리스크가 높은 직접투자부터 곧바로 시도하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사업자금 연 10억원 이하, 매출 연 10억원 이하, 종업원 10인 이하, ‘텐텐텐’ 구조인 제작사(중소기업)가 은행의 주고객인 만큼 기업은행은 이들을 상대로 한 대출 업무부터 시작했다. 2012년 7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와 함께 3년간 1388억원 규모로 조성된 ‘문화 콘텐츠 강소기업 전용 펀드’를 통해 기업은행 문화콘텐츠사업팀은 최대 2%까지 금리 감면 혜택 등 저리의 자금을 제작사에 지원한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처음엔 수월하지 않았다. 제조업 같은 다른 산업에 비해 담보력이 약하고, 재무제표(회사의 경영과 재산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류) 관리가 익숙지 않은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금융부 양성관 부장은 “특히, 재무제표는 제1금융권 자금 조달 고려 조건 중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하지만 문화 콘텐츠 산업에 있는 중소기업들은 재무제표가 제대로 관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재무제표 대신 우리가 눈여겨봤던 건 콘텐츠의 가치와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재무제표만 봐도 투자 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산업과 달리 콘텐츠 가치를 판단하다보니 심사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대출이나 간접투자(펀드) 요청이 들어오면 문화콘텐츠금융부 직원 모두 시나리오를 읽고, 직원들끼리 시나리오 회의를 한다. 그다음, 책임자 회의와 상위 기구인 심사부의 승인을 거쳐 투자를 결정한다. 투자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재무제표 관리를 포함해 최근 3년간 신용등급, 콘텐츠 추정 매출, 감독, 배우, 제작 능력 등 여러 가지다. 정 팀장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진행하다보니 심사 막판에 투자가 철회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세금체납 기록이 뒤늦게 발견된다거나 제작자 신용이 불량한 상태임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콘텐츠의 가치가 아무리 좋다 해도 은행으로서는 투자하기가 꺼려진다”고 전했다. 그러다보니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보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제작사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작사가 필요하다면 재무교육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문화 콘텐츠 대출 업무를 맡고 있는 기업은행 56개 지점에 콘텐츠 디렉터라는 담당자를 배치해 경영, 회계, 세무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기업은행은 문화부와 문화 콘텐츠 강소기업 육성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강소기업 99개를 선정해 31개 업체에 229억원을 대출하고, 10개 기업에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했다.
대출 업무를 통해 문화 콘텐츠 산업을 하나씩 학습한 문화콘텐츠금융부는 IBK캐피탈과 함께 100억원을 출자해 총 150억원 규모의 IBK금융그룹상생협력펀드를 조성해 간접투자를 시작하며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앞에서 언급했던 <명량>을 비롯해 <수상한 그녀> <관상> <신의 한 수> <설국열차>,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뮤지컬 <레미제라블> 등 총 3040건 5417억원(지난해 말 기준)을 대출 또는 간접투자했으며, 올해는 6월 말 기준으로 1492억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올해 직접투자를 시작하면서 문화콘텐츠금융부는 자금 조달 방식을 대출, 간접투자, 직접투자 세 가지로 확대했다. 직원 수도 18명으로 늘어나면서 조직은 문화콘텐츠팀에서 문화콘텐츠금융부로 재편됐다. 정성희 팀장의 설명에 따르면 문화콘텐츠금융부의 문화 콘텐츠 사업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자금 조달 창구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그게 펀드를 통해 간접투자를 하는 보통 창투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또 하나는 은행 전문가의 재무 감각과 콘텐츠 전문가의 콘텐츠 분별감각이 융합된 새로운 유형의 투자팀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정성희 팀장은 “단순히 콘텐츠 전문가가 직원으로 합류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은행원의 시야에서 절대 손을 댈 수 없는 분야가 콘텐츠 전문가와의 융합을 통해 투자가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은행의 문화 콘텐츠 투자 사업을 두고 영화계는 일단 긍정적이다.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 엄용훈 대표는 “수익을 최소화하더라도 리스크를 크게 부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제1금융권이다. 대출을 해줄 때 물적 담보와 인적 담보를 설정하는 것도 원금 회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투자 목표라고 생각하는 일반 창투사와 달리 제1금융권은 로 리스크, 로 리턴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제1금융권이 충무로에 뛰어든 건 영화 시장을 ‘판’이 아닌 ‘산업’으로 인정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엄용훈 대표의 얘기를 들은 정성희 팀장은 “영화 산업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뛰어들었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돈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인식이었다. 모태펀드가 나랏돈이라는 이유로 ‘손해 좀 보면 어때?’ 하는 인식도 많았다”며 “금융자본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른다. 기업은행의 시장 참여가 몇몇 영화만 대박을 치는 널뛰기식 산업 체질을 ‘로 리스크, 로 리턴’ 같은 건강한 체질로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향후 3년간 총 7500억원 투자 계획
하지만 제1금융권의 영화 사업 투자가 처음이 아닌 데다가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던 점을 두고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를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투자배급사 투자팀 직원은 “제1금융권이 다시 영화 산업에 들어온 사실은 긍정적인 사인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할 때”라며 “대출, 간접투자, 직접투자 세 가지 투자 방식이 갖춰진 만큼 기업은행으로선 올해와 내년이 중요할 것이다. 지금부터 그들의 향후 투자 규모, 투자 계획이 궁금한 이유”라고 신중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 역시 올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올해부터 향후 3년간 총 7500억원을 문화 콘텐츠 사업에 투자할 계획을 내놓은 것도 그래서다.
문화 콘텐츠가 다른 산업에 비해 주목받기 쉬운 산업이기에 기업은행의 문화 콘텐츠 투자 사업은 금융권의 다른 은행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산업은행은 약 600억원 규모로 조성된 CJ E&M 펀드에 절반 정도 투자했다. 수출입 은행은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넛잡: 땅콩도둑들>의 해외 진출을 지원했다. 앞으로 수출입은행은 ‘글로벌콘텐츠펀드’ (가칭)를 조성해 해외에 진출하는 한국영화를 투자할 계획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일시적인 움직임일 수도 있겠지만, 매번 적지 않은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판’을 활력과 도약의 생산적인 장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를 비롯한 제1금융권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