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거의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같은 화재 경고 표어처럼 흔한 관용구가 되었다. TV드라마와 예능에서도 단골 멘트로 등장한 지 오래됐다.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이 삶의 구호는 동일성을 강제하는 전체주의적 체제에 대해 존재와 욕망의 다양성을 대립시키는 꽤나 매력적인 선동이기도 했다.
90년대 풍경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차이의 정치학’을 주창하며 존재를 가시화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이 모든 동일성의 권위를 조롱했으며, ‘취향의 다양성’이란 구호는 단조로운 삶의 밀도에 활기를 부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흘러, 서로 논쟁을 벌이다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면 쿨한 표정을 지으며 “취존하시죠”라고 말하게 됐다. 취향을 서로 존중해 입을 다물자는 것이다. 더이상 논쟁을 지속하거나 말마디를 얹으면 눈치 없는 꼰대로 치부되기 일쑤다. 어느덧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당의를 입은 채 ‘다르다’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다. 욕실 타일처럼 각기 분자화된 모자이크 사회.
게다가 사정이 바뀌어 다른 맥락이 스멀스멀 번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가 다름을 존중해 달라고 할 때, 다른 한편에선 동성애 혐오도 취향의 다양성이라고 응수한다. 혹은 영화평론가가 좋은 영화를 말할 때, 관객은 평론가들을 비난하며 취향의 다양성을 역설한다.
우린 서로 다르네요, 취존하시죠. 이제 논쟁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서로 말들을 쌓아올려 진실을 도래시키는 순간들이 사라지고 있다. 축적된 지성과 전문가는 이제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꼰대 계몽주의로 헐값에 매도된다.
앤서니 기든스를 비롯한 90년대 사회이론가들은 이렇게 지식인의 전문성을 회의하고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대중을 ‘성찰성’이란 이름으로 찬양했었다. 하지만 지성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린 사회가 정말 성찰적인가?
혹시 차이와 다양성만을 부각하는 이 삶의 구호는 어떤 공통된 기획이나 유토피아를 무효화한 채 ‘무수히 다른 것들’의 무질서를 방치하는 것으로 이윤을 축적했던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저 무한한 소비에의 욕망을 겉만 그럴듯한 취향의 다양성이란 말로 포장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엊그제, 포털 영화란 댓글들을 우연히 보다가 영화평론가들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이 즐비하게 전시된 걸 목도하고 무척 당황했다. 취향의 다양성이란 구호들을 연호하며 지성에 대한 혐오를 노골화하는 이 황량한 풍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지성이란 말들의 탑이고, ‘공통의 것’을 지반 삼는다. 우린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공통의 것’을 철거하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