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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은총을 위해

이후경 영화평론가의 편지

저 언덕 너머의 나무에게

영화에 등장하진 않지만 모리(가세 료)와 권(서영화)을 따라 언덕을 넘어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너에게 쓴다. 때로 현실 속에 없는 짝을 찾아 떠도는 것 같았던 모리와 권의 목소리에 홀려, 나도 영화 속에 없는 너를 떠올리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 가까운 일본이 아닌 아득히 먼 세계에서 날아온 듯한 모리의 첫 번째 편지가 그랬듯, 혹은 딴 세상으로 모리를 데려가려는 듯한 권의 귀신 울음이 그랬듯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들은 무섭거나 슬프기보다 평온했어. 그래서인지 지면과 육신에 정박해 있지 않은 그 목소리들이 나를 어딘가 좋은 곳으로 데려가주길 바랐던 것 같아.

그리하여 닿은 곳이 <자유의 언덕>이라는 영화 속이었고, ‘자유의 언덕’이란 이름의 카페 주변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무작위로 섞인 시간 속이었고,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한 북촌 어딘가의 작은 언덕너머였어. 그중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모리처럼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것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내가 아는 건 세 번째 언덕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감동적이었단 사실이야.

힘겹게 서로를 찾아 헤매던 모리와 권이 비로소 함께 언덕을 오르는 장면이야. 둘의 어깨와 등과 팔과 손에는 무거운 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모리가 끄는 가방 바퀴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지.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가던 모리와 권이 차례로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작고 투명한 우산 하나를 같이 쓰려고 팔짱을 꼭 꼈는데, 그 고단한 형상과 소리가 얼마나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노란색과 파란색의 가드레일도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막아주는 듯했어. 모리의 내레이션이 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주 튼튼하고 큰” 딸을 낳았노라 알려줬고, 그들 옆으로 서로를 꽉 껴안은 짝들을 태운 오토바이들이 슝슝 활보했지. 이윽고 점점 작아지던 그들은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췄어.

무엇보다 가슴 뭉클했던 것은 두 남녀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함께 나아가는 뒷모습이었어. 이제껏 홍상수 영화 속 남녀들이 말로만 약속했던 것이 진짜 몸짓으로 새겨진 거지. 그동안 유예되었던 중식과 연주의 다짐(<하하하>)이 이루어진 순간 같았달까. 늘 서로 마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남녀들, 혹은 홀로 문이나 숲이나 담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던 여자들과 프레임 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맴맴 돌았던 남자들, 그들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이 갑자기 이 영화에서 출현해버리니 당혹스러웠고 귀했어. 모리의 시간론을 약간 빌려 말하자면, 그건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한계 짓는 시간적 인과율로부터 문득 자유로워진 꿈같은 찰나였지. 그곳에서는 ‘가장’이라는 부사와 ‘훌륭하다’는 형용사와 ‘존경한다’는 동사도 그리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어. 심지어 ‘사랑’이나 ‘행복’이란 말에 매달릴 일도 없을지 모르지. 그래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떠나가는 듯한 작고 연약한 한짝의 연인이 마냥 딱하고 애처로워 보이지만은 않았고 거의 가볍고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했어. 그렇게 이 영화는 ‘자유’라는 다소 거창한 단어를 소박하게 품어낸 것 같아.

이 작은 은총을 위해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이 존재한다고 말해도 될까. 뒤엉킨 시간 덕분에 꿈속인지 죽음 속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위치에 나타날 수 있었던 자유의 언덕, 이곳에서 모리와 권은 꿈과 같은 리듬으로 스크린 너머를 향해 떠나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 같아. 그들을 보며 난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했었는지, 이 세상이 뭔지, 시간이 뭔지” 다 잊어버리고 “완전한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줄 “아주 튼튼하고 큰” 나무와 하나가 되는 꿈을 꾸었어. 그 꿈이 참 위로되고 고마웠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썼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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