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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늘 그곳에 있었어요

남다은 영화평론가의 편지

강아지 꾸미님에게

이 편지가 느닷없어 보일 줄 잘 압니다. 홍상수 감독의 세계에 편지를 쓰면서 그 수신처를 남자도, 여자도, 담배꽁초도, 오리배도, 남산타워도 아닌 강아지 꾸미님에게 두다니요. 하지만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서 모리(가세 료)씨와 당신의 엄마 영선(문소리)이 처음 만나던 순간,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영선의 적극적인 탐색에 모리씨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카메라가 살짝 옆으로 움직이자, 당신이 ‘이미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고요히 모든 걸 지켜본 자처럼 고고하고 심드렁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모리씨 사이의 어색한 거리감, 그러나 이상한 온기 같은 것이 흐르고 있어서 이 짧은 순간이 마법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조금은 엉뚱하게 등장해서 남녀간의 교묘하고 어색한 공기를 압도해버리는 당신의 동물적인 투명함을 느끼며, 당신이야말로 ‘자유의 언덕’의 주인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꾸미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꿈’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모리씨는 좋은 이름인 것 같다고 말하며, “개들은 자는 걸 좋아하니까”라고 덧붙입니다. 처음에 자연스럽게 들리던 그 말은 생각할수록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잠을 잔다고 모두 꿈을 꾸는 건 아니니까요. 아니, 모두가 꿈을 기억하는 것도, 꿈을 꾸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모리씨에게 잠과 꿈은 동의어 같고, 꿈에서는 삶을 옥죄는 틀이 작용하지 않으므로 좋은 세계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영화 안에서 그는 자꾸만 잠이 듭니다. 그는 꿈꾸기 위해 여행을 온 것입니다. 권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하루의 시간 안에 놓여 있지만, 그가 답을 기다리며 꾸는 꿈의 시간은 무한대로 펼쳐진다고 말하고도 싶습니다. 그러니 이름부터 ‘꿈’이라는 당신이 왠지 처음부터 모리씨와 말없이도 통하는 비슷한 유의 생명체 같아 보였다면 제 억지일까요? 모리씨에게 당신은 그저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당신도 그걸 모를 리 없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모리씨가 골목길을 걷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멈춰 섭니다. 놀랍게도 또다시 당신은 ‘이미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리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하얀 나비가 날아가고 당신은 경쾌하게 따라가는데, 금세 우리는 그것이 나비가 아니라 휴지 조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리씨를 다시 쳐다보던 당신은 골목을 돌아 사라집니다. 이전과 이후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영선씨가 카페 문을 연 사이, 당신이 집을 나갔고, 마침 모리씨가 당신을 발견한 것이 이야기의 사실관계라고 유추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주는 인상은 그런 이야기의 내용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한낱 휴지 조각이 나비로 보이던 순간, 집을 잃은 가여운 강아지가 신묘하고 당당한 영혼처럼 보이던 순간이야말로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필연처럼 그 자리에 왔고, 당신이 모리씨의 발걸음을 또 다른 꿈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 초현실적인 공기 안에서 당신과 모리씨를 구분짓는 동물과 인간이라는 경계는 한없이 하찮아집니다. 같은 꿈 안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있으니까요.

그 장면의 기운이 내내 맴돌기 때문일까요? 소망과 욕망, 유혹과 양심, 미련과 후회, 위선과 용기로 가득한 꿈의 면들은 얽혀 있지만 단순한 활력으로 숨쉬고, 이성적인 시간계열이 무너져 있어도 충만한 세계를 이루며, 몹시 피로한데, 이상하게도 참으로 맑습니다. 저는 이 영화 속 꿈의 미로를 곰곰이 떠올려보다가 당신과 모리씨가 마주한 골목의 그 신비로운 장면에만 이르면 다른 모든 두려움을 잊게 됩니다. 영선씨의 반려견으로서가 아니라, 모리씨의 세계를 공유하는 꿈의 동무로서 저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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