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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의미 있는 농담
이다혜 2014-08-21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 민음사 펴냄

무대에 불이 켜진다. 짧은 티셔츠에 밑위가 짧은 바지 때문에 배꼽을 드러낸 여자들이 오간다. 한 남자가 그 배꼽들에 홀려 있다. 불이 꺼졌다 켜지자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미술관 근처에 있다. 십대 소년이 그에게 발자크, 베를리오즈, 위고, 뒤마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을 내민다. 이렇게 한명씩 등장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은 때로 둘, 혹은 셋, 혹은 넷이 모여 대화를 하고 파티에서 어울린다. 이제 이야기는 언제 시작하지?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는 분량이 길지 않기도 하거니와(149쪽) 각장의 길이가 두어 페이지에 불과해서 여백도 꽤 많다. 하지만 초반에는 책장을 넘기는 데 버퍼링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물이 하나씩 등장하고 퇴장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연극을 보는 듯하고, 번화가의 커피숍에서 창밖 사람들을 응시하는 기분도 든다. 그러고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이 오간다.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된다는 라몽의 변이 그런 발화행위 중 하나다. 그 이유인즉슨,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 것 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거야.” 그러고는 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가, 나르키소스라는 평가를 내리게 되는 지인 다르델로가 도마에 오른다. 머저리 나르키소스로 보였던 그가 갑자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역시 이유가 있다. “암이래. 그 말 듣고 내 마음이 얼마나 안 좋은지 깜짝 놀랐어.” 그런데 불과 몇장 전에, 독자는 무대에 등장한 다르델로를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중병일까 염려하며 의사에게 갔다가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들은 그가 라몽에게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이유 없는 유쾌함을 만끽하며 돌아오는 장면으로.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의미 없는 거짓말이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담이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버린다. 스탈린의 재미없는 농담 역시 몇번씩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다른 장면이 덧붙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흰색 상의와 포르투갈 아가씨’ 장만 따로 떼어 읽으면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다. 파티를 돕기 위해 포르투갈 가정부가 온다. 그리고 손님으로 온 파키스탄 출신의 칼리방을 만난다. 둘은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없고, 그녀는 신세 한탄을 하다가 그에게 관심을 표한다. 그녀는 포르투갈어로 그에게 만난 기쁨을 전하고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그런데 이 장은 선행하는 ‘칼리방’과 나중에 등장하는 ‘마리아나에게 작별 인사’와 이어 읽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 의미를 맞추어가며 찾아가다보면 이 모든 과정이야말로 농담일 뿐 아닌가 싶어지는, 밀란 쿤데라의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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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농담 <무의미의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