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편의 영화가 한데 모여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옥석을 가려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관객의 반응이 뜨거웠거나 예술적 발자취를 깊이 남길 만한 작품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영화들이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거나 예술적 가치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5편이 여타 영화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좀더 폭넓은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뿐이다.
삶은 쉽게 바뀌지 않아<월요일 아침>
감독 오타르 요셀리아니 출연 자크 비두, 아리고 모조 제작국 프랑스
“나는 말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다 해도, 작가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말로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다. 나의 혀는 내가 말하려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만큼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
올해 베를린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그루지야 출신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셀리아니는 <안녕, 나의 집!> <불한당들> <그리고 빛이 있었다> 등을 통해 우화와 풍자로 가득한 영화세계를 선보여 타르코프스키, 파라자노프 등과 함께 구소련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꼽혀왔지만, 우리에겐 미지의 명감독으로 남아 있는 인물. 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 3번이나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세계 영화제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그의 신작 <월요일 아침>은 범작이 다수를 이뤘던 베를린영화제에서 가장 높은 꼭지점에 서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한 중년 남성의 갑갑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독특한 유머감각으로 녹여낸 이 작품은 예술적 완성도와 대안적인 영화문법이라는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공장에선 용접공으로 일하는 뱅상(자크 비두). 새벽같이 일어나 공장에 출근한 뒤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작업을 진행하다 퇴근하면, 아내에게 시달리고 두 아이에게 무시당해야 하는 무감각한 일상을 반복하는 그에게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어느날 공장 문 앞에서 단호히 발길을 돌린 뱅상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리라 다발을 갖고 베니스를 찾는다. 그는 몰락한 귀족 같은 분위기의 아버지 친구를 만난 뒤 자신과 비슷한 신세인 카를로(아리고 모조)를 만난다. 그의 집에서 잠을 청한 뱅상은 월요일 아침 카를로가 자신과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카를로를 공장에 바래다준 뱅상은 큰 배에 선원으로 취직하지만, 그곳에서도 삶은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결국 8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뱅상의 눈앞에는 자신이 다니던 공장의 굴뚝이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뱅상의 모습은 찰리 채플린의 그것과 디졸브된다. 슬리퍼를 벗고 자동차에 탄다거나 흡연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공장에서 기회가 나는 대로 담배를 피우려 노력하는 우스꽝스런 모습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빡빡한 굴레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운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공장과 가족에 치여 자신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도, 베니스에서 소매치기한테 지갑째 털려도, 술집에서 우악스런 남자들에 의해 억지로 음주를 강요당해도 그는 군소리 없이 그저 상황을 자신의 안으로 맞아들일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며 일상적인 고독감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에 대해 요셀리아니는 “이 영화는 슬픔을 담은 코미디다. 현재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건 공장에서건 뿔뿔이 흩어져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비극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불가능하다. 쿠크 선장이나 아메리고 베스푸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세계를 탐험한 이래 모든 대륙에선 비슷한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유난히 따뜻한 분위기와 전작에 비해 다소 무뎌진 풍자성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의 표정은 조금 침울해진다. “나의 초기작들을 지금에 와서 보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나이브함뿐 아니라 멍청함까지 보게 된다. 나는 그동안 크게 변화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시간이 지나고 늙어가면서 갈수록 낙관적인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볼셰비키 정권이 몰락하는 상황을 보며 나는 나이브하게도 낙원이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나빠졌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의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사 대사가 있다 해도 그것은 영화의 전체 맥락과 큰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젊은 남녀가 화학수학에 관해 진지하게 얘기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는 바로 키스를 하거나 더 나아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녀 서로가 관심이 없는 분야의 추상적인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자가당착을 암시한다. 말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또 나는 영화에 있어 대사라는 것은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 영화를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보여준 적 있는데, 그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다 이해하더라. 결국 포용력을 갖고 있다면,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영화 전반에 걸쳐 담배를 피우려는 사람과 이를 막는 사람간의 ‘투쟁’이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에 관해 “세상에 퍼지고 있는 금연 또는 건강에 대한 집착이라는 심리적 질병에 관한 일종의 스케치”라고 그는 표현하기도 했다.
노래, 눈물, ‘나와 만인의 투쟁’감독 프랑수아 오종 출연 카트린 드뇌브, 이사벨 위페르, 에마뉘엘 베아르, 파니 아르당 제작국 프랑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섹스의 에너지와 금기의 선을 과감히 돌파하기로 이름난 프랑수아 오종의 초호화 캐스팅 ‘상업영화’에 대한 관심은 이번 베를린을 뜨겁게 달군 요소 중 하나였다. 오종에 따르면, 은 “애초 여성들이 여러 명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조지 쿠커의 1939년작 <여인들>을 리메이크하려다 판권을 확보하지 못해 헤매다 찾게 된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가족제도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여성들만의 독특한 연대감을 잘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는 범죄영화, 뮤지컬, 앙상블영화 등 다양한 영화적 요소에 근친상간, 동성애 등의 요소까지 무겁지 않게 담아내는 경쾌한 코미디. “이번 영화제의 성비를 맞추는 데 공헌한 작품”이라는 한 기자의 이야기처럼 프랑스 최고 여성스타 8명을 한꺼번에 내세웠다는 점도 이 작품에 눈길을 돌리게 한 이유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오랜만에 모인 가족 앞에 이 집의 유일한 남성인 가장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영화에서도 장모, 아내, 딸, 하녀, 누이, 정부할 것 없이 8명의 여인들에겐 모두 그럴듯한 살인동기가 존재한다. 영화에서 8명의 여인들은 다양한 조합으로 모여 대화를 나눈다. 이들이 모이면 누군가를 의심하지만, 그 의심받는 존재는 이내 자신을 해명하는 노래를 그럴싸하게 불러젖혀 누명을 벗는다. 그때 그녀에 대한 의심이 풀어지는 듯하지만, 서로를 범인으로 옥죄기 위한 여인네들의 음모와 간계는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서로 싸우다가도 눈물로 화해하고, 다시 ‘나와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소란이 극에 달할 즈음, 영화는 슬며시 깜짝 놀랄 반전을 꺼내든다.
프랑스에서 개봉 첫날 흥행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이 영화는 베를린에서도 화끈한 반응을 얻었다. <타게스슈피겔>의 평론가 투표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했고, 시사회장과 기자회견장도 최고의 열기를 보였다. 8명의 여인들이 북치고 장구치는 영화였던 탓인지, 기자회견에서도 여인들의 활약은 돋보였다. 특히 카트린 드뇌브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녀는 촬영 당시 여배우들간의 경쟁과 질투가 어땠냐는 질문에 대해 “남자나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질문”이라며 일축했고, 이 영화가 여성의 비밀을 파헤쳤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그런 문제에는 흥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가족, 사랑이자 미움인<사소한 사고>
감독 아네트 K. 올센 출연 야니 파우르슈, 예스퍼 크리스텐센, 마리아 뷔르글러 리히 제작국 덴마크
아네트 K.올센 감독은 “이 영화는 도그마영화가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했지만, 덴마크의 젠트로파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도그마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장면이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해 조명이 없는 가운데 핸드헬드로 찍혔고,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때때로 보는 이를 자극하며, 배우들은 완결된 시나리오 없이 즉흥 연기를 펼쳤다는 점 등에서, 이 영화를 도그마의 지류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하다.
사실 <사소한 사고>가 도그마영화인가 아닌가는 그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남편과 두딸, 아들, 남편의 동생 등이 겪는 심리적 공황과 그 해소를 잔잔하게 그리는 이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감이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미세한 거미줄을 뛰어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가진 관객이라면, 어느새 아버지 또는 딸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곤 흠칫 놀랄 정도로, 이 영화가 묘사하는 가족 구성원들간의 관계는 생생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영화가 영국 감독 마이크 리 방식의 ‘메소드 연기’를 주된 방법론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직접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한 이 방법론은 완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배우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감독에게 제안한 주체이기도 한 다섯명의 주연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각각 3명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캐릭터를 연구했고, 장기간의 토론을 통해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실제 상황에서 캐릭터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기 위해 시나리오가 개발되는 1년 반 동안 배우들끼리는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배우들에게 시나리오가 전달된 시점은 촬영 1개월 전이었다”라고 올센 감독은 설명한다. 또 “배우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나와 배우 사이의 힘겨루기는 있을 수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섹스<몬스터스 볼>
감독 마크 포스터 출연 빌리 밥 손튼, 할리 베리, 히스 레저 제작국 미국
베를린에 초대된 2편의 미라맥스표 ‘독립영화’ 중 하나였던 <몬스터스 볼>은 절망이란 벼랑의 끝자락에 선 남녀의 사랑을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려내는 수작이다. 미국 남부 조지아의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는 행크(빌리 밥 손튼)는 교도관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흑인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인물. 하지만 같은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들 소니(히스 레저)는 흑인들에게 친절한 청년이다. 어느날 한 흑인을 전기의자에 앉혀 사형을 집행하던 소니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자 행크는 그를 질책하고, 이에 충격받은 소니는 권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다. 상처를 입고 일을 그만둔 행크는 래티샤(할리 베리)라는 흑인 여성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한데 그녀는 당시 사형당한 흑인의 아내였던 것. 래티샤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외아들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영화는 서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과 세상에 마음을 열게 되는가를 매우 감동적으로 그려나간다.
사형제도, 흑백갈등, 세대간의 대립 등 <몬스터스 볼>이 끌어안으려는 주제는 자못 방대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각각의 사안에 관해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이들 주제를 두 주인공의 내면으로 깊이 끌어들여 구체성과 설득력을 동시에 획득한다. 하이라이트는 행크와 래티샤가 처음으로 격렬한 섹스를 나누게 되는 장면. 미국에선 NC-17등급을 받을 것을 우려해 상당부분 삭제해야 했을 정도로 적나라한 노출을 오래 보여주지만, 이 장면은 에로틱하지 않다. “섹스는 상처를 치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엄청나게 감정이 억압된 상태의 두 캐릭터에겐 인간적인 욕구를 분출하도록 하는 동물적인 섹스는 큰 의미를 갖는다”는 마크 포스터의 생각대로, 이날 밤을 계기로 두 사람의 삶의 조직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거창한 사회적 대립도 화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할리 베리의 연기는 은곰상이 아깝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남부에 사는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이자,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흑인 여성 래티샤라는 캐릭터를, 베리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소화했다. 이렇게 똑 부러지게 얘기할 줄 아는 그녀가 말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여성은 복잡하고 인간 냄새가 나는 역할을 맡기 어렵다. 때문에 제대로 된 여배우는 이런 훌륭한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한다. 유색인종 여성인 내게 큰 예산의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하는 것 또한 이런 영화에 출연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영화산업 내에서 흑인들의 지위를 다른 인종의 그것과 비슷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풍차를 향해 돌진하다
감독 키스 풀턴, 루이스 피페 출연 제프 브리지스(음성) 제작국 영국
파노라마 부문에 출품됐던 이 작품은 이번 베를린영화제에서 가장 인기를 끈 다큐멘터리 중 하나.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블록버스터 프로젝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제작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에는 보통의 메이킹 필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영화의 좋은 면을 홍보하는 데 급급한 일반 메이킹 필름과 달리 이 영화는 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 즉 연출자의 광기에서부터 스탭들의 불만까지 생동감 있게 잡아낸다.
사실 촬영 8주 전인 2000년 8월부터 보여주는 이 영화의 초반은 밋밋하기까지 하다. 엄청난 규모의 세트가 만들어지고, 미술팀의 작업이 속속 선보이는 등, 이 유럽 최대의 프로젝트엔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길리엄 감독이 직접 그린 콘티를 움직이는 화면으로 보여준다든가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길리엄의 영화세계를 유머러스하게 소개하는 장면도 범상한 메이킹 필름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조니 뎁, 장 로슈포르 등 스타를 집결시킨 채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가면서 이 프로젝트의 치부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1주 전만 해도 거의 완벽해 보였던 프리프로덕션 과정의 미숙이 하나하나 표출되면서 상황은 급박해진다.
첫날 촬영을 위해 찾은 사막은 스페인 공군의 훈련장 부근인 탓에 하루종일 전투기 소음이 울려퍼졌고, 다음날엔 세트가 떠내려갈 정도의 비가 내려 촬영장이 물바다가 되기도 한다. 별 촬영도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만 한 상태에서 돈키호테 역의 로슈포르는 건강검진을 받는다며 파리로 향하고, 그가 없는 상태에서 조니 뎁만 나오는 분량을 찍으랴, 투자자들에게 현장 소개하랴, 손실파악을 위해 나온 보험사 직원 상대하랴,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 상황에서 길리엄 감독은 시종 “Fuck!”만 외치거나 스탭에게 화풀이하며, 간혹 몽상가처럼 “이것 이것만 해결되면 이렇게 빨리 찍을 수 있을 거야”라며 되뇌기도 한다. 이후 수주 동안 로슈포르가 돌아오지 않아 촬영이 이뤄지지 않자 조감독을 비롯한 일부 스탭은 계약파기를 선언한다. 투자자가 손을 떼기로 하면서 결국 이 프로젝트는 무기한 중단된다(이 프로젝트는 최근 다시 촬영을 재개했다).
영화에는 길리엄의 인상적인 말이 흘러나온다. “소설에서처럼 현실이 돈키호테에 승리를 거뒀다는 게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진짜 돈키호테는 풍차처럼 거대한 이 프로젝트에 홀홀단신 돌진한 테리 길리엄이라는 게 이 영화의 결론인 듯 보이기도 한다.▶ 제52회 베를린영화제 수상결과
▶ 제52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 베를린에서도 재연된 <나쁜 남자> 논쟁
▶ <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 5편
▶ 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