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원씨와 남진아씨는 오랫동안 한 팀으로 손발을 맞춰온 선후배이자 27개월된 아들을 사이에 둔 4년차 부부. 감독과 배우, 제작자, 홍보담당자, 스탭 등 범영화계에서 일과 생활을 나누는 부부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들처럼 문자 그대로 같은 일에 몸담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더구나 30kg이 넘는 조명기를 들고 뛰는 조명 일이 워낙 물리적인 ‘힘과 체력’을 요하는 터라 오랫동안 여성 인력에 대한 벽이 높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여간해서 보기 힘든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같은 현장에서 서로 볼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남진아씨로서는 “계집애가 무슨 조명이냐, 분장이나 해라”던 일각의 시선을 버텨내고 바라던 조명감독에 첫발을 디디면서 늘 좋은 후원자였던 남편, 같은 꿈을 꾸는 여자후배들을 볼 면목이 생겼고, 최성원씨로서는 같은 입장에서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끊임없는 자극을 주고받을 든든한 동료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게 된 셈이니 말이다.그들이 조명기를 들기 전에는…
부부이기 한참도 전에, 영화현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92년 이두용 감독의 <뽕3>를 찍으면서다. 임재영 조명감독의 휘하로 촬영에 합류한 당시, 최성원씨는 이미 수년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조명 퍼스트였다. 딱히 영화에 관심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덕공고를 졸업하던 81년, 동네 선배인 박만창 조명감독의 소개로 우연히 촬영장을 드나들며 일을 거들다가 조명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다녀와서부터. “조명부에서 좀 ‘빠릿하다’ 싶으면 촬영부에서 오라고 하는, 손윗부서 같은 분위기”를 아직 풍기던 때라 더욱 조명에 대한 오기가 생겼다. 마침 염효상, 고영광, 박종환 등 동네 친구들도 다 조명일을 하고 있었고, 각자 일이 끝나면 서로의 촬영장으로 놀러가서 1년에도 예닐곱편의 현장을 경험하곤 했다. 전쟁물이나 사극을 많이 하면서, 연결신이 있을 때마다 지방 촬영장을 오가는 엑스트라들의 경비를 줄일 겸 <뽕3>의 일본군 헌병을 비롯해 가마꾼, 포졸 등으로 이방 수염을 달고 카메라 앞으로 불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던 때였다. 최성원씨에 비하면 남진아씨는 조명보다 영화에 대한 애착이 먼저였다. 중학교가 국악시범학교인 탓에 취미활동으로 가야금을 배운 그는, 공부에 별 관심없던 고교 3학년 때 입시를 치를 겸 가야금을 전공했었다. 그렇게 서울예대 국악과에 진학은 했지만, 흔한 말로 돈도 백도 없으면 교내 악단조차 들어가기 힘든데다 딱히 흥미도 재능도 없다는 생각에 그저 관두고 싶을 뿐이었다. 마냥 영화가 좋았던 그때는 뭐가 됐든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다른 관객과 마찬가지로 조명이 뭔지도 눈에 안 들어왔다. “카메라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마술”이라고 여겨 촬영을 지망했으나 그러려면 조명을 알아야 한다는 충고에 옆길로 샜다. 졸업 직후 이제는 제목도 가물가물한 심형래 영화에 촬영 도중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최입춘 조명감독 밑에서 <김의 전쟁>을 찍는 등 서너편의 현장을 지나온 뒤였을까. ‘대마이’(카메라), ‘사시코미’(전환 잭) 등 일본어가 많이 쓰이던 장비 용어를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현장수업에 정신없는 막내로, <뽕3>와 임재영 조명감독 팀에 들어갔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들에 따르면, 당시 <뽕> 시리즈는 시리즈마다 커플이 하나씩 있었는데, 1편에서 여배우와 결혼한 차정남 조명감독과 또다른 2편의 커플에 이어 결과적으로 “<뽕3> 커플”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때였다. 물론 최성원 감독은 조명협회가 있던 남산 건물 옆에 선 파마 머리의 남진아씨를 처음 봤을 때, “쟤가 조명한다는 여자애구나” 싶어 눈여겨봤다지만 말이다. <뽕3>는 <키드캅> <미스터 맘마>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애니깽> 등 임재영 조명감독 아래서 보낸 3년여의 작업을 포함해 <퇴마록>까지, 30여편의 영화에서 함께 빛을 다루게 되는 10년지기 인연의 시작에 불과했다. <키드 캅>을 끝내고 프랑스 유학 준비를 마쳤던 남진아씨가 티케팅까지 해놓고도 “기재를 아는 애가 없어서 엉망진창”이라며 급하다는 전화에 달려갈 수밖에 없을 만큼 믿는 선후배지간이었으니까. 떠날 생각도 함께 품어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은 ‘조명계’를 영영 떠날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아직 임재영 감독의 조명부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애니깽>이 겹치는 바람에 팀이 나뉘었던 94년. 서른살이 되면서 일에도 예전 같은 흥이 나지 않을 무렵, 최성원씨는 사업계획서를 내보라는 아버지의 제의에 마음이 동해 정말 뚝배기 라면집 주인으로 업종변경을 할 뻔도 했다. 밤에는 촬영장에 김밥을 배달하고, 낮에는 라면 뷔페를 하는 사업 구상에 한창일 때, <애니깽> 촬영차 멕시코에 가야 했던 임재영 감독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맡기고 떠났다. 본의 아니게 <헐리우드…>의 촬영을 70% 정도 도맡아 하게 되고는, “처음엔 로케이션 잘 나가다 나이트신 닥치면서 3번을 헤맸다”. 극중 최민수가 하늘에 달이 하난데 왜 그림자는 두개냐며 조명감독들에게 대드는 장면인데, “발전기 세대랑 크레인에 이동차까지 갖다놓고도, 도무지 답이 안 나왔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헤매고 난 뒤에는 라이트 하나로도 조명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고, 무엇보다 ‘오너’를 해보니까 사업계획은 까맣게 잊을 만큼 신이 났다. 더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린 연인>을 끝으로 독립한다. <애니깽> 때문에 멕시코에서 7개월을 뒹굴면서 지칠 대로 지쳤던 남진아씨는 돌아오자마자 일단 영화를 떠났지만, 결국 현장을 잊지 못해 발길을 되돌리면서 선배 최성원씨를 따라나섰다. 독립 혹은 자립은, 달콤한 자유만큼 가볍지 않은 책임을 대가로 지웠다. 몇몇 후배들과 함께 온라이팅(On Lighting)이란 조명사무실을 차렸지만, 남진아씨는 물론 최성원씨도 정식 입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진 않았다. 최성원씨는 김진한 감독의 <경멸>과 <햇빛 자르는 아이> 등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한편, 문화영화와 비디오 작업으로 돈을 모아 장비를 마련하고, 남진아씨는 조명 관련 책을 긁어모아 교재도 만들어가며 후배를 키우겠다는 의욕에 넘쳤다. ‘동네 친구들’인 조명감독들도 온라이팅에 합세한 뒤 모두 스무명 정도로 식구가 늘어나면서는, <진짜 사나이> 같은 영화에 조명기와 인력을 빌려주며 버텼다. 하지만 빚을 져가며 HMI 같은 고가의 장비에 투자하고, 한달에 600만∼700만원에 이르는 경상비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98년 IMF 이후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남은 건 빚뿐. 두 사람은 당장 손에 잡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두 사람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작품이 96년의 <유리>다. <유리>는 최성원씨의 입봉작이자 남진아씨가 처음 조명 퍼스트를 맡은 영화. 조명협회의 인준을 받은 작품만 하게 돼 있는 규정을 어긴 탓에 입봉과 동시에 제명을 당한 비운(?)의 영화기도 하다. 당시로서는 자신의 작품을 하고 싶은 혈기가 우세했지만, 두 사람 다 입봉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입봉을 빨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를 충분히 해서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라고. 하지만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외부의 빛을 일일이 차단한 뒤 촛불승의 움막을 짓고, 움막 주위에 화이트보드를 360도 둘러 반사를 주면서 짚으로 된 움막 틈새로 비치는 빛까지 꼼꼼히 고려해가며 찍은 <유리>는 최성원씨가 처음으로 마음껏 빛을 실험한 영화라 큰 후회는 없다. 아직도 어떤 기재를 썼는지 기억한다는 남진아씨 역시, 외딴 바위만 있는 허허벌판에서 라이트의 2/3를 하늘로 쏘아올리는 천공반사란 걸 처음 알게 된 <유리>가 특별한 경험이다. ▶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1)▶ 조명기를 든 부부 최성원. 남진아 이야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