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현은 신인배우다. 어떤 이들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 동생 혹은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꽃미남 신입 형사 태일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안재현은 스타다. 그는 모델 시절부터 SNS상에서 20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보기 드문 사례였으며, 10대 소녀들에겐 밤잠을 설치게 하는 애정의 대상이었다. 연기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영화, 드라마 관계자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건 너무도 분명하게 빛나는 안재현의 잠재력을 런웨이가 독점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델이라는 직업의 미래와 가능성을 짐작하려는 이들에게도 안재현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스물여덟, 모델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첫 번째 정체성이 모델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연기자와 음악 프로그램 MC(<엠카운트다운>), 주얼리 디자이너(AA.Gban) 등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규정하기보다 주어지는 기회와 새로운 환경에 스스로 발빠르게 적응해나가는 안재현의 장점은 곧 지금 시대가 원하는 엔터테이너의 자질이기도 하다. 올가을 개봉예정인 <패션왕>을 빌미로 그와의 만남을 청했다. “영화지 표지를 촬영하는 날이 오다니!”라는 말과 함께 그가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왔다. 안재현이라는 매력적인 신세계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얼마 전 <너희들은 포위됐다>(이하 <너포위>)의 촬영을 마쳤다. 인터뷰 일정도 마무리 단계라고 들었는데, 요즘 어떤 생각을 하나. =인터뷰를 하며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 좋더라.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쉬지 않고 달려왔다.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와 <패션왕>을 함께 촬영했고, <패션왕>이 끝날 때쯤 중국영화 <웨딩바이블>을 찍었고, 그 뒤엔 <너포위>에 출연했다. 마치 긴 하루가 끝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드라마의 경우 반응이 빨리 오지 않나. <너포위>를 마치고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별그대>를 촬영할 때에는 시청자가 “저 친구 누구지?” 하는 얘길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너포위>를 찍고서는 “드라마에 잘 녹아들었다”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 것 같다.
-<너포위>의 태일은 배우 안재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휴머니즘’ 멜로, 액션, 동료들과의 좌충우돌 에피소드와 복잡한 집안 사연 등을 통해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별그대>의 윤재보다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별그대>보다 <너포위>에 더 많이 나왔다. 50신 중 30신은 걸린 것 같다. 태일은 다리 역할을 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대구(이승기)는 복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지국(박정민)이는 개구쟁이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고. 태일은 이 친구들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럽고, 한발 뒤에서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캐릭터. 태일이가 드라마의 전체적인 그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바랐는데 생각대로 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
-현장에서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더라는 배우 박정민의 증언이 있더라. (웃음) =<너포위>는 <별그대>보다 더 급하게 합류하게 됐다. 대본을 받고 이틀 뒤에 전체 리딩이었으니까. 그래도 드라마 현장을 한번 접하고 나니 어떤 부분을 준비하고 공부해야 할지 알겠더라. 시놉시스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읽었다.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해서 편해지지는 않더라. 부담은 똑같이 있었고, 급하게 촬영한 몇몇 장면은 아쉬움도 남는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는 것 이외에 촬영현장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스탭들과 친해져야지. 유인식 PD님도 촬영장에선 감독님이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동생처럼 예뻐해주셨다. 자연스럽게 형님,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더라.
-중요한 노하우를 알고 있다. (웃음) 영화 <패션왕>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영화 출연은 처음이었을 텐데. =처음에는 인사드리러 가는 자리라고만 들었다. 그런데 미팅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투자배급사 NEW의 대표님과 오기환 감독님이 “재현씨, 잘 부탁해요” 하시더라. (웃음) 모델로 활동할 때부터 나를 지켜봐왔지만 연기에는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별그대>를 보고 바로 연락을 주신 거라고 들었다. 내가 원호라는 캐릭터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며, 재현씨가 이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기분 좋게 촬영에 들어가게 됐다.
-원작 웹툰은 봤나. =<패션왕>이 연재되고 있을 때 이미 봤다. 엉뚱하고, 만화적인 상상력을 극대화한 작품이라 재밌더라. <패션왕> 촬영에 들어갈 때 전체 회식 자리에 기안84 작가님도 오셨다. 원호로 출연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농담으로 작가님께 이런 말도 했다. “저도 모델 생활 열심히 했는데, 웹툰에 저 닮은 캐릭터 안 나오던데요? (웃음)” 그랬더니 작가님이 이번에 연재하는 신작 <복학왕>에 나 닮은 친구를 만들어 주셨다. “안재현 닮았어”라는 대사도 있고. (웃음)
-영화 <패션왕>의 원호는 주인공 우기명과 대립하는, 일종의 라이벌 관계라고 들었다. =대립하는 역할이긴 한데 나름 사연 있는 친구다. 늘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기명이를 통해 그 완벽한 삶에 균열이 생기는 인물이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점점 자기도 모르게 인정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 원호의 심경변화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별그대>에서는 반항기 있는 고등학생을 연기했는데, <패션왕>의 고등학생 원호는 어떤 느낌으로 연기했나. =원호는 내숭도 있고, ‘나 착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야’라고 포장하는 느낌도 있다. 고등학생이지만 어린애 같은 면이 남아 있다. 감정적으로 유치한 모습도 많이 보일 거다. 지금 10대들은 한층 성숙할 수도 있지만, 영화 속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거라 ‘10대’라는 점을 어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원작 <패션왕>의 가장 큰 재미는 다양한 등장인물의 패션 대결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매 에피소드가 일종의 ‘패션쇼’라고 할 수 있는데, 프로 모델로서 패션 대결을 펼치는 영화에 출연하는 기분이 어땠나. =재밌었다. 실제로 패션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도 현장에 오셨다. 어떤 장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델로서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다만 원호가 프로 모델이 아니라 모델을 꿈꾸는 친구이다보니 어설픈 느낌을 내야 하나 고민은 됐다. 결국 원호는 모델처럼 보이는 게 좋겠다 싶어 멋지게 갔지만.
-영화 현장에서의 첫 촬영날을 기억하나. =음…. 화보 찍는 신이었다.
-화보 신이었다면 NG도 많이 안 났겠다. =어유, 기가 막히게 한번에 갔다. (웃음)
-혹시 NG가 많이 났던 장면도 있나. =유독 한 장면이 그랬다. 박세영씨와 러브 라인이 있는데, 그 친구를 사랑스럽게 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초면이고, 감정이 너무 안 잡히는 거다. (웃음) 세영씨에게 너무 미안하더라. 이 장면을 빨리 마쳐야 하는데…. 감독님이 내가 계속 NG를 내니 “원호를 사랑하자!”라고 외치셨다. 분위기는 좋아졌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까 부담이 돼서 더 안 되더라. (웃음)
-우기명을 연기하는 주원은 동갑내기 배우다. 현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딕션’이었다. 주원씨도 그 부분에 대해 자기도 늘 생각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은 발음에 또박또박 얘기한다면 재미가 있을까 싶다고 말을 해주더라. 늘 연기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말도 해줬다. 대사가 들리지 않아도 연기력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 대사를 말하는 데 치우치지 말고 조금 릴랙스하라고. 너무 고맙고, 많이 배웠다. 현장에서 나는 늘 배우면서 시작해 배움으로 끝맺는 것 같다.
-한때 연기에 자신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몇 작품을 거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감을 느낀 순간이 있나. =<너포위> 종방연 때. 전날 밤을 새우고 와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는데, 고생한 것, 추웠던 것, 더웠던 것, 잘한 것, 못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확 스쳐가더라. 이래서 연기를 계속하는 거구나 싶었다. 모델로서 늘 결과물이 바로 나오는 작업을 했었는데, 과정이 중시되는 작업을 하는 매력이 또 있었다.
-연기를 해보니 이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나. =모델로 활동하면서는 쉬는 날이 없었다. 한달만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모델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면 배우는 한 작품을 끝내고 몇달 동안 쉬니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었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해보니 배울 것도 많고, 쉬는 게 말 그대로 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나가야 하는 과정이더라. 대단한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배우 얼굴’이라는 말, 왠지 많이 들어봤을 것 같다. 모델 할 때 많이 들었다.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때는 속상했다. 나는 모델로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모델 안재현’을 각인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던 부분도 있다.
-모델 활동을 기반으로 연기를 병행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인가. =그렇다. 모델 일과 연기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모델은 모델만의, 배우는 배우만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개의 다른 직업인 거지. 다만 연기를 할 때 모델 활동을 겸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더라. 마음은 모델과 배우, 양쪽에 다 있다.
-모델, 배우뿐만 아니라 음악 프로그램 MC와 주얼리 디자이너도 겸하고 있다. 당신의 행보가 후배 모델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나무 안에서 계절이 계속 바뀐다. 어떤 날은 배우라는 열매를 맺고, 또 어떤 날은 모델이라는 꽃이 피는 것과 같다. 가을에 낙엽이 지거나 겨울에 눈꽃이 피거나, 나무는 그대로 나무인 것처럼 본질은 그대로이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배들에게도 모델의 대안이 연기만은 아니라고 늘 얘기하는 편이다. 좀더 폭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한다. 모델로서의 생명이 끝나면 어떡하지, 이렇게 고민만 할 게 아니라 마음을 확고히 하고 생각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