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의 <뜨거운 안녕>을 불렀다고 하면, 그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사람들도 ‘아~’ 하고 두눈을 반짝인다. 이름보다 목소리가 더 유명한 뮤지션이란 말은 분명 엄청난 칭찬이다. 이지형이 7월 초, 12곡의 사랑 노래가 담긴 세 번째 소품집 ≪Duet≫을 내놓았다. 그는 정규앨범을 낸 뒤엔 어쿠스틱 곡들로 채워진 소품집을 냈고, 소품집을 낸 뒤엔 정규앨범을 냈다. 그렇게 지금까지 3장의 정규앨범과 3장의 소품집이 세상에 나왔다. 일상의 배경음악이 되기에 딱 좋은 이지형의 음악은 ≪Duet≫에 이르러 더없이 편안해졌다.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매력을 알아버린 이 남자와 마주 앉아 새 앨범 얘기부터 육아 얘기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는 마성의 목소리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마성의 유머 코드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작업실에 매일 출근하듯 나가나. =스케줄이 없을 땐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실에 있는다. 방이 두개 있는데, 원래 혼자 쓰다가 월세만 내고 비워두는 경우가 잦아서 최근엔 데이브레이크의 이원석, 김선일씨랑 같이 쓰고 있다.
-꾸준히 정규앨범과 소품집을 번갈아 내고 있다. 정규앨범과 소품집에 수록되는 곡들을 가르는 개인적 기준이 있나. =정규앨범엔 여러 음악적 욕심을 담으려 했고, 소품집은 어쿠스틱 중심의 포크앨범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이번 앨범까지만 유효할 것 같다. 앞으로는 앨범을 낼 계획이 없어서. 싱글이나 EP만 내지 않을까 싶다.
-이유가 있나. =음악 신이 변했다. 사람들이 앨범은 사지 않는데 앨범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나 앨범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지는 것 같다. 항상 컨셉추얼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나름의 내러티브가 있어야 하고. 그런 건 6장의 앨범을 통해서 다 표현한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앨범 만드는 데 스스로 재미를 잃었다. 캐주얼하게 작업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하다.
-3집 ≪청춘마끼아또≫는 청춘의 한시절을 정리한 앨범이자 이지형의 음악인생 1장을 정리한다는 느낌을 줬다. 그 뒤 세 번째 소품집 ≪Duet≫을 내놓았다. ≪Duet≫엔 심플하고 편안한 곡들로 가득하다. ≪청춘마끼아또≫와 ≪Duet≫ 사이, 음악적 지향점이 변했는지 궁금하다. =잔욕심들을 버리려 했다. 악기도 더 빼고, 가사도 더 단순하게 쓰고, 작법도 단순하게 가려 했다. 통기타 한대랑 목소리만 남는 거, 그게 궁극적인 지향이었다. 버라이어티하게 채우는 데서 오는 재미도 있는데 그건 ≪청춘마끼아또≫에서 다 해버렸다. 비우는 데서 오는 재미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원래는 곡 하나 쓰면 수정에 수정, 검증에 검증, 의심에 의심을 계속하면서 고친다.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아쉬운 게 있어도 곡을 쓸 때의 순간적 느낌을 믿었다.
-최대한 심플해지는 것, 그게 더 힘들지 않나. =정말 어렵다. 채우고 포장하는 건 하다보면 길이 생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이걸로 지지고 볶으려니 힘들더라. 그런데 비워냄에서 오는 희열이 마치 신세계처럼 다가와서, 앞으로 10년, 20년은 이것만 파도 모자랄 것 같다.
-얘기했듯, ‘아무 고민 없이 한번에 씌어진 곡’들로 ≪Duet≫을 채웠다. 곡 작업에 걸린 시간도 짧았던 것으로 안다. =녹음 시간이 짧았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작업실에 10시쯤 나가서 저녁 8~9시까지 있는다. 하루에도 곡을 몇곡씩 쓰는데, 그렇게 만든 40~50곡 중에서 한번에 씌어진 곡들만 추리다보니 지금의 12곡이 모였다. 김훈 작가도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글쓰기 훈련을 한다고 하지 않나. 강도하 작가도 작품을 연재하지 않더라도 항상 무언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곤 한다더라. 작곡 훈련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음악하는 사람 중엔 창작 훈련이 생활화돼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뮤지션들이 한량 기질이 있어서 노는 거 좋아하고 닥치면 한다. 그런데 몇년째 꾸준히 작곡 훈련을 하다보니 지금은 항상 창작에 대해 준비 상태가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놓칠 일이 없다.
-하루에 최대 몇곡까지 써봤나. =진짜 후진 노래 7곡까지 만들어봤다. 들려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후진 노래였다. (웃음) 음악을 만드는 건 쉽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좋은 음악을 만들기가 어려운 거지. 그림 그리는 사람한테 꽃그림 10장만 그려줄래 그러면 후딱 그려주잖나. 마찬가지로 작곡 자체는 힘들지 않다.
-곡 달라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없다. 진짜로. 이번 앨범에 수록된 <수지>도 원래 JYP에서 의뢰가 와서 만든 곡이다. 그런데 좋다고 하고선 안 쓰더라. 그래서 내 앨범에 실었다.
-12곡이 모두 사랑 노래다. 처음부터 사랑 노래들을 모을 생각이었나. =우연히 12곡을 들여다보니 사랑 노래였다. 의도한 건 아니다. 원래 사랑 노래 잘 못 쓴다. 자아, 성찰, 갈등 그런 주제로 곡을 더 많이 써서.
-수록곡 <Duet>은 원래 여성 보컬과의 듀엣을 생각하고 만든 곡이었는데, 여성 보컬이 섭외되지 않아 혼자 불렀다는 슬픈 얘기가 전해지더라. =3명한테 가볍게 물어봤는데 거절당했다. 그러면 차라리 혼자 부르는 게 어떨까, 남녀가 같이 불러야 할 노래를 혼자 부르면 더 청승맞고 궁상맞지 않을까, 해서 마지막에 과감하게 혼자 부르기로 결정했다.
-가사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일상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가사 작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는데, 느껴보지 못한 감정은 도저히 쓸 수 없다. 써도 되는데, 국정원에 잡혀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안 되더라. 그럴싸하고 멋있는 표현이 있어도 느껴본 적 없으면 가사 쓰기를 포기한다.
-<사랑은>의 가사는 꽤나 시적이던데. =맞다! 나도 마음에 든다. 내가 써놓고도 얼굴 들기 부끄러운 곡이 있는가 하면 ‘혹시 나 천재 아냐?’ 싶은 곡도 있다. <사랑은> <봄의 기적> 같은 경우는 후자다. (웃음) 가사를 쓸 때는 단어와 문장의 흐름과 조합이 균형잡히게 하려고 한다. 조미료는 되도록 첨가하지 않고.
-가사에 조미료 맛이 전혀 안 난다. =그것도 실은 좀 문제다. 약간의 조미료가 첨가되면 사람들이 좋아할 텐데 그런 게 너무 없으니까. 십센치 친구들은 워낙 가사를 재밌게 쓰는데, 조미료를 나름 웰빙으로 승화시킨 경우다. 데이브레이크의 (이)원석 형도 뻔하고 촌스러운 가사를 많이 쓴다. ‘뜨거 뜨거워 요즘 넌 너무 뜨거워’(데이브레이크의 신곡 <Hot Fresh>의 가사)처럼. 으악,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런 가사 난 절대 못 쓴다. 그런데 그게 또 관객의 심장을 관통할 때가 있다.
-데이브레이크의 이원석, 십센치의 권정열과는 함께 ‘007코리아’를 결성해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꽤 돈독한 사이 같아 보인다. =정열이는 <아메리카노> 나오기 전부터 알던 사이다. 원석이 형과 정열이는 데이브레이크와 십센치가 조인트 콘서트를 하면서 친해졌고. 그렇게 셋이 커피 마시면서 놀다가 팟캐스트도 하게 됐다.
-팟캐스트는 누가 먼저 제안했나. =내가 했다. 세명의 조합이 좋고 이 관계가 오래갔으면 싶어서 생산적인 장치를 하나 만들어보자 했던 거다. 그럼 우리 팟캐스트해볼까? 리더는 내가 할게. (웃음) “언젠가 데이브레이크와 십센치로 돈을 못 벌게 되는 시점이 있을 거다. ‘007코리아’로 내가 슈퍼스타 만들어줄게.” 그렇게 두 사람한테 큰 비전을 제시하면서 꼬였다.
-그런데 ‘007코리아’의 정체를 도무지 모르겠다. =나도 잘 모른다. 원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하려고 했다. ‘007코리아’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는데, 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명소나 맛집을 소개해서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되는 게 목표였다. 그러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실은 우리가 가수였다, 하면서 공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셋 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거기서 막혔다. 그나마 내가 제일 잘하는데, 영어로 물건 살 정도의 실력이라….
-항상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것 같다. ‘The Home’ ‘Tea Party’ 같은 이지형만의 브랜드 공연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음악도, 성격도, 외모도 내게는 기발한 무언가가 없다. 그런데 음악 외적인 거, 무대나 공연은 독창적인 게 좋더라. ‘Tea Party’는 대한민국에 파티 문화가 처음 상륙해서 파티 피플들이 넘쳐나기 시작할 때 생각했던 공연이다. 입 밖으로 파티라는 말만 꺼내면 핫해 보이는 시절이었는데, 그런 게 꼴보기 싫으면서도 시대에 뒤처지긴 싫고, 나도 파티를 해보고 싶고, 그런데 술 마시고 춤추는 건 싫고. (웃음) 가장 나다운 파티를 만들어보자 해서 탄생한 게 ‘Tea Party’다. 공연장이 아닌 카페에서 마이크 없이 생으로 네다섯 시간씩 노래를 들려준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줄 때 좋아한다. 성시경이 춤을 추면 좋아하듯이. 어떻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게 연극과 콘서트를 결합한 ‘The Home’이다. 옛날에 연극과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 <고고70>에도 잠깐 출연했다. =카메오로 출연했다. 연기는 재미있는데 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2000년대 초/중반쯤엔 배우가 되고 싶어서 영화사나 프로덕션 미팅도 많이 했다. 미팅만 하면 다 합격이었다. 힘 있는 단역, 조연으로 여러 번 캐스팅됐는데, 작품들이 다 엎어졌다. 나를 눈여겨보는 프로덕션은 다 망하는구나, 싶더라. (웃음) 그런데 어릴 때부터 찰리 채플린을 좋아했다. 채플린처럼 혼자서 시나리오 쓰고 음악 만들고 연기까지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음악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연극 ‘The Home’이 탄생했다.
-9월13일과 14일에 여섯 번째 ‘Tea Party’가 열린다. 이번엔 야외 공연이다. =마이크임팩트 옥상을 빌렸다. 항상 특별한 공간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대림미술관에서도 콘서트를 열었었고.
-그외에 계획이 있다면. =≪Duet≫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11월에 하고, 세 번째 ‘The Home’ 공연은 내년 초에 하게 될 것 같다.
-참, 아기는 지금 몇살인가. =다음달에 두돌된다.
-아빠가 되니 어떤가. 책임감이 막중한가. =책임감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안 받는다. 요즘은 바빠서 많이 못 놀아주는데, 괜찮은 아빠인 것 같다. 육아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하면 편해지는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빼는 순간 육아는 지옥이 된다. (웃음)
세 번째 소품집 ≪Duet≫
이지형의 세 번째 소품집 ≪Duet≫은 <Be Fine>으로 시작해 <삼포가는 길>로 문을 닫는다. <빰빰빰>의 여름 확장판이라는 <느낌적인 느낌>, 비틀스의 오마주 넘버 <Happy Birthday To You>, 듀엣곡이 될 뻔했으나 솔로곡이 된 <Duet>, 멋진 자장가 한곡 만들고 싶어 써봤다는 <잠이 오질 않아> 등 12곡의 노래는 모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업 과정의 다이어트가 더없이 담백한 결과물로 이어진, 이지형표 어쿠스틱 사운드 종합편이라 부를 만한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