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마냐니는 미모가 뛰어난 배우가 아니다. 키도 큰 편이 아니며, 몸매도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금발의 푸른 눈도 아니다. 말하자면 배우가 되기에는, 특히 주연배우가 되기에는 별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냐니는 전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를 통해서다. 마냐니는 여기서 파시즘에 희생되는 이탈리아의 하층민 피나 역을 맡았다. 악으로 변한 권력, 이에 맞서는 가난하지만 올곧은 여성을 연기하며 마냐니는 이탈리아 관객은 물론, 전세계 관객으로부터 강한 연민을 끌어냈다. 마냐니는 결국에는 희생되고야 마는 하층민의 억울한 운명을 천성처럼 연기했던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스타로 등극
마냐니의 개성은 먼저 용기로 기억된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은 겁 없는 여장부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냐니가 스타로 평가된다면, 그건 용기 같은 특별한 미덕을 가져서라기보다는 <무방비 도시>의 피나처럼 동정심의 대상이기 때문일 터다. 마냐니는 우는 연기를 아주 잘했다. 결혼을 앞둔 행복 앞에서 울고, 파시즘의 몰염치에 울고, 이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의 용기에 운다. 그리고 자신처럼 시대에 희생되는 가난한 이웃의 억울한 운명 앞에서도 설움이 복받쳐 운다. 사실 이건 연기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감정의 결과처럼 보였다. 편집 없이 하나의 숏 안에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얼굴로 변하는 마냐니의 모습은 현실이지 허구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냐니가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면 바로 이렇게 자신은 물론 타인의 행복에, 또 고통에 함께 우는 맑은 동정심을 표현할 줄 알아서일 것이다.
마냐니는 실제로 하층민 출신이다. 미혼모의 딸인데, 그래서 부친은 보지도 못했다. 모친은 갓 태어난 딸을 외갓집에 맡겨버렸고, 마냐니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다. 외갓집도 사정이 좋지 않아 마냐니를 남들처럼 교육시키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마냐니를 프랑스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보냈다. 이곳에서 그녀는 프랑스어와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피아노를 치며 프랑스 샹송을 곧잘 불렀다. 이것이 마냐니에겐 삶의 나침반이 됐다. 마냐니는 10대 후반에 연기 교육을 제대로 받기 위해 로마의 드라마학교에 등록했다. 그런데 마냐니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밤에는 카바레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부르고, 낮에는 학교에 다녔다. 얼마나 노래를 잘했던지 ‘이탈리아의 에디트 피아프’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연계에 그녀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세작 <무방비 도시>에 출연할 때 마냐니는 37살이었다. 영화배우로는 대단히 늦은 편이다. 따지고 보면 외모 탓이 컸다. 파시스트 정부는 빛나는 외모를 가진 여성을 이탈리아의 모델로 제시하고 싶어 했다. 파시즘 시절 영화에는 유독 여신 같은 배우들이 많았다. 영화가 정치적 선전 도구로 이용될 때였고, 이런 문화는 마냐니에겐 불리했다. 단역, 조연을 주로 맡던 마냐니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네오리얼리즘의 꽃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무방비 도시>를 통해 로셀리니와 마냐니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영화인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은 당시에 연인 사이였다. 이들의 두 번째 합작품이 <사랑>(1948)이다. 이 영화는 두개의 에피소드, 곧 ‘사람의 목소리’와 ‘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장 콕토 원작을 각색한 ‘사람의 목소리’는 마냐니 혼자 연인의 마지막 전화통을 붙들고 끊지 말라고 애원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이 극심하게 교차하는 심리극인데, 마냐니는 자칫 부담이 될 수 있는 드라마를 능수능란하게 끌어간다. 세계의 모든 영화인들이 마냐니의 연기에 압도당한 것은 물론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마냐니를 위해 쓰다
로셀리니와 마냐니는 두 천재의 만남처럼 보였다. 그것은 동시에 네오리얼리즘의 보석 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이 관계는 잉그리드 버그먼의 출현으로 깨진다(<씨네21> 910호 참조). 그 유명한 로셀리니와 버그먼의 연애사건이 이때 벌어진다. 로셀리니는 버그먼의 곁으로 가버렸고, 혼자 남은 마냐니는 자칫 슬럼프에 빠질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성격처럼 더욱 활달하게 영화에 몰두한다. 그리고 약간의 행운도 찾아온다.
이때 마냐니의 버팀목이 된 감독이 루키노 비스콘티다. <벨리시마>(1951)를 통해 자식의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탈리아 여성의 전형을 그려냈다. 곧이어 비스콘티와는 에피소드영화인 <우리는 여자다>(1953)에서 다시 만난다. 당시에 비스콘티와 친하게 지내던 작가가 테네시 윌리엄스다. 그는 미국 내의 매카시즘 때문에 사실상 이탈리아로 피신해 있었고, 좌파감독 비스콘티를 만나 드라마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비스콘티의 <센소>(1954)에서 대사를 정리한 작가가 테네시 윌리엄스였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반한 배우가 바로 안나 마냐니다. 윌리엄스는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마냐니의 연기에 압도당했다. 윌리엄스가 오로지 마냐니를 염두에 두고 쓴 드라마가 <장미문신>(1951)이다. 마냐니는 매일 영어로 연기하는 연극에는 부담을 느꼈고, 이것이 영화화될 때(1955) 출연했다. <장미문신>은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이탈리아 이주민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종족 드라마’(Ethnic Drama)이다. 시칠리아의 전통적인 여성인 세라피나 델레 로제 역을 맡은 마냐니는 과부가 된 뒤에도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며 자신은 물론, 딸의 교제까지 한사코 막으려고 한다. 이때 그녀 앞에 나타난 신체 좋은 이탈리아 이주민 트럭 운전사가 버트 랭커스터다. 이탈리아 사람의 열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으로 마냐니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은 마냐니는 여성의 심리묘사에 발군인 조지 쿠커 감독의 <바람은 강하게 불고>(Wild Is the Wind, 1957)에 출연하며 베를린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곧이어 테네시 윌리엄스와 다시 손을 잡고, 시드니 루멧 감독의 <도망자>(The Fugitive Kind, 1959)에서 젊은 말론 브랜도의 나이 든 연인으로 나왔다. 역시 이탈리아 이주민 여성인데, 성적 에너지가 폭발할 것 같은 브랜도와의 위험한 사랑을 마다지 않는 역할이다. 40대 후반 이후의 이때가 마냐니 경력의 절정이었다.
훌륭한 배우는 타인의 고통을 연기를 통해 공감케 한다. 이것도 특별한 재능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마냐니의 연기에는 고통의 상처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연기라기보다는 현실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냐니가 울 때, 관객은 더 위로받는다. 그녀의 삶 자체가 연기가 된 것이고, 타고난 배우란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