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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의심과 미혹을 넘어

<명량> 최민식

인간 이순신의 고뇌. 최민식은 오직 그것 하나와 싸웠다. 12척의 배로 울돌목에서 왜선 330척을 격파한 명량해전, 하지만 그 전설의 역사 뒤에는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이순신의 고뇌가 배어 있다. 조선은 오랜 전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고, 누명을 쓰고 파면당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의 피로 또한 헤아릴 길 없다. 주변에는 온통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뿐이다. 지난해 촬영현장에서 만난 최민식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셨나요?”라고 감히 직접 이순신에게 묻고 싶다고 했다. 도무지 그의 행동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고,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 손톱만큼의 거리라도 그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명량>은 기나긴 후반작업을 거쳐 무려 1년의 시간을 더 보냈다. 최민식 또한 그사이 뤽 베송의 <루시>에 출연하며 해외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지난 1년 전의 다짐과 의문으로부터, 그는 과연 어떤 답을 찾았을까?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셨습니까?” 지난해 여름, 가까이 이순신대교가 보이는 전남 광양 촬영장을 찾았을 때 최민식은 ‘이순신에 대한 호기심을 안은 채 매일 답을 찾고 있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가 보여준 여러 국면의 행동들이 ‘속인’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날 이후 이순신으로부터 속 시원한 대답을 들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감독이나 동료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뭔가 잡히는 게 있다. 그들과 마시는 술의 양만큼 그 캐릭터를 내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말한 그는 “<명량>은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이 도통 들어맞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순신이라는 사람이 무척 가까워 보였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위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분명 방에 계셔서 ‘저기 장군님, 잠깐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청했음에도 끝까지 문을 안 열어주는 느낌이었다. 문을 열어줄 것처럼 하시면서 끝까지 그대로였다. 밖에 누가 왔는지, 인기척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참 야속했다. (웃음)”

인간 이순신의 참모습을 찾아

<명량>은 압도적인 열세로 시작한다. 1597년 임진왜란 6년,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모진 고문 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마저 불타고 단 12척의 배만 남았다. 더구나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류승룡)가 왜군 수장으로 나서며 조선은 더욱 술렁인다. <명량>은 명량해전이라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3박4일간의 기록이다. 그 와중에도 이순신은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 그러니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자세로 전투에 임한다. 질 것이 뻔해 보이는 싸움 앞에서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최민식이 애초에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최민식이 이순신에게 다가가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난중일기>를 마르고 닳도록 읽는 것이었다. 불러도 대답 없는 그 방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순신이 1592년 1월1일부터 1598년 11월17일까지 기록한 <난중일기>는 출전한 날과 감옥에 수감된 날 등 부득이 쓰지 못한 경우만을 제외하고, 실제의 정황을 틈나는 대로 기록한 전쟁문학의 백미로 국보 제76호다.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진영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과 전쟁 상황, 당시 느낀 감정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장군님 방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답이 없으니 정말 막막했다. 당연히 임진왜란이나 이순신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었지만, 하나같이 찬양 일색이었다. 뭔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배우의 자존심으로 그런 이미지를 그냥 ‘복사’하는 건 싫었다. 분명히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적 면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고들다보면 뭔가 하나 걸려들겠지, 그래도 인간인데! (웃음)”

그가 보기에 <난중일기>에는 지옥도 같은 전장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인간 이순신’의 참모습이 담겨 있었다. 더불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낯설고도 신선한 체험이었다. “솔직히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물론이고 고통을 미화하거나 자신을 치장하는 글은 전혀 쓰지 않는다. 그렇게 담백할 수가 없다. 쓸 만한 내용이 없으면 그날 일기가 ‘맑음’ 혹은 ‘맑았으나 북풍이 세게 불었다’라는 날씨 묘사 한마디로 끝이다. (웃음) 정말 가식 없고 솔직한 성품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히려 그래서 그분의 고독과 고통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담담하게 이어져오던 일기가 어느 날 ‘오늘은 머리를 부여잡고 앉은 채로 밤을 지새웠다’라거나 ‘곽란이 점점 심해져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으니 눈물만이 흘렀다’,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와서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대목을 읽으면 오히려 더 마음이 요동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앞에서

인간의 본성은 진짜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신이라는 전체를 이루는 단락 중 명량해전의 전과 후는 가장 모진 비바람 속에 놓여 있던 시기다. 부하 장수들은 옥고를 치르고 온 그가 너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이전과 비교하면 도통 말도 없고 남의 얘기를 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순신을 보고 모였던 병사들이 이젠 그가 있어도 동요할 지경이다. 그가 무모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순신은 군율을 지키기 위하여 도망치다 잡혀온 병사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피 묻은 칼을 그대로 들고 성큼성큼 사라지는 이순신을 산 위의 일본 밀정이 내려다보고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복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순신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복안에 대해 묻는 아들 이회에게 그는 복안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람들 사이에 독버섯처럼 퍼져버린 두려움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회는 거듭 그 두려움을 극복할 방안에 대해 묻지만, 그는 담담하게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마치 신선처럼 덧붙인다. “(그 두려움을) 이용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게 흘러간다. 하얗게 세어 풀어헤친 머리로 잠을 청한 그의 앞에 거북선이 화염에 휩싸인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겼던 거북선은 그렇게 잿더미가 된다. 영화가 다루는 시간은 불과 3박4일 정도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오직 나라의 장수된 자로서의 ‘의리’ 하나만으로. 그것은 아들 이회가 말하는 ‘몰염치한 임금’에 대한 충(忠)이 아니다. 이순신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라는 말과 함께 오직 그것이 백성을 향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런 이순신을 연기하며 최민식은 어떤 흠집(?) 찾기를 포기했다. “아무리 공을 세워도 임금은 무시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저런 무조건적인 충성심이 나올까. 처음에는 ‘그도 사람인데’라는 생각으로 접근했지만,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한번은 긴 시간 메이크업을 한 뒤 머리에 투구를 쓰고 허리에 칼을 차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현실의 나라는 인간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배우로서 그를 연기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초라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은 야속한 장군님이시지만(웃음) 이제는 그저 내 연기가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너무 거대한 인물과 대면했기 때문일까, 그는 인터뷰 내내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었다. 오랜 시간 이순신으로서 살았다는 영광스러움과 배우로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한데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매 작품 내게 중요한 의미를 남기지만, <명량>만큼 개운하지 않은 영화는 처음이다. (웃음) 그건 여운이 많이 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파이란>이나 <올드보이>,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등을 끝냈을 때는 말 그대로 그냥 개운했다. 물론 언제나 100% 만족하지 못하고 후회가 남는 법이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됐다’는 생각 정도는 들었다. 그런데 <명량>은 아직 다 끝내지 않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온갖 지랄발광을 다 해봤지만(웃음) 이처럼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가 얘기하는 만족과 불만족은 오히려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에 느끼게 된, 종이 한장 차이의 경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명량>의 이순신과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해외 프로젝트 <루시> 캐스팅을 더 반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약조직의 운반책인 루시(스칼렛 요한슨)를 이용하고 끝없이 추격하는 악당 ‘미스터 장’ 역할이다. 어쩌면 그로서는 이전작의 개운하지 못한 뒷맛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명량>에 출연하면서 그분을 더 존경하고 흠모하게 됐는데, 정작 그분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무려 1년 전에 촬영을 끝낸 작품이고, 그 뒤 꽤 긴 시간 한국을 떠나 있었는데도 마치 지난주에 크랭크업한 기분이다. (웃음) 뭐랄까, 아직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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