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에 만든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스티븐 소더버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했다. 소더버그는 <리틀 킹> <카프카> 등 야심작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몰락하면서 급전직하,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재기하기까지 오랜 터널을 거쳐야만 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 두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로 올리면서 ‘천재’라는 칭호를 회복했다. 다시 그를 천재라 부르는 이유는, 두편의 영화가 주제나 형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영화를 서로 다른 스타일로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린 브로코비치>가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를 중심에 놓은 평이하고도 아기자기한 드라마라면, <트래픽>은 소더버그의 영화적 테크닉이 모든 것을 끌어가는 ‘힘의 드라마’다. 서로 다른 장소의 이야기, 갈색과 청색, 내추럴톤의 세가지색 필터를 능란하게 바꿔가며 스티븐 소더버그는 정신없이 관객을 끌어간다. 그가 이끄는 대로 티후아나, 샌디에이고, 신시내티를 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은 놀라움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나하나의 작은 사실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배신하는지를 <트래픽>은 정교하게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핸드헬드를 주무기로 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연기자들이 토해내는 숨결까지 담아내는 소더버그의 박진감 넘치는 영상은 배우와 극중 인물의 내밀한 ‘감정’까지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도그마 선언의 방식과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영화 만들기 방식을 결합하면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판단은 현명했다. <트래픽>은 단 한순간도, 단 한자의 필름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트래픽>은 너무나 가열차서 결말이 희망으로 끝난 뒤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분노가 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니시리즈를 각색한 <트래픽>의 주인공이 하비에르도, 로버트도 아니라는 것이다. <트래픽>의 주인공은 바로 마약이다. 마약이 어떻게 이 세계, 특히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아가는지를 <트래픽>은 보여준다. 마약이 어떻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헤집어놓는지를. 소더버그는 마약의 ‘경로’를 화면 위에 쫙 펼쳐놓는다. 우리는 <트래픽>의 이곳 저곳을 쏘다니며 ‘마약’이 무엇이고,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깨닫는다. 그 청사진 위에 뭇사람들의 인생이 수직으로 겹쳐진다. 헬레나는 빈민층에서 상류층으로 수직상승했다. 남편이 마약상임을 알고 분노, 실망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재기한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성공을 내칠 수 없었다. 그 수단이 마약이라 할지라도. 캐롤린은 WASP의 최상층에서, 마약을 위해 흑인에게 몸까지 파는 ‘최저’의 삶을 택한다. 딸을 찾아 나선 로버트에게 캐롤린의 남자친구는 말한다. 이 쓰레기 같은 빈민굴에 와서 마약을 사는 건 모두 백인들이다. 흑인들은 백인에게 마약을 팔아 단 몇 시간 만에 수백달러를 벌 수 있는데, 왜 공부 같은 것을 하겠는가. 소더버그의 주장대로 마약은 범죄가 아니라 국민보건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막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악의 손길을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래픽>이 위대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결말은 현명하지 않다. <트래픽>에 교훈이나 설교가 없다는 현지의 평도 적합하지는 않다. 전체를 읽어내던 <트래픽>은 결국 모든 ‘전술적 승리’로 끝을 맺는다. 굳이 그래야 할 필연성도 없이. 스티븐 소더버그의 천재성은 아직 ‘기교’에 치우쳐 있다.
김봉석 기자 lotus@hani.co.kr
<트래픽> 배우들
웬만해선 그들을 대신할 수 없다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낯선 배우를 쓰면 누가 누군지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란 스티븐 소더버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세개의 장소마다 중심적인 인물이 두세명씩 나온다. 아무리 필터로 갈라준다 해도, 그 많은 인물들의 궤적을 촘촘하게 따라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건 겸손이다. <트래픽>은 그 누가 어떤 배역으로 나온다 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인물들의 성격이 분명하고 활기넘친다. 각 인물들의 성격과 동선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사와 치밀한 상황전개 그리고 인물들의 마음까지 잡아주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카메라는 <트래픽>의 배우들의 연기를 한껏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트래픽>에서 첫손 꼽히는 배우는 단연 베네치오 델 토로다. 선한지, 악한지 헷갈리게 만드는 싱그러운 미소로 등장한 베네치오 델 토로는 마약전쟁의 중심에서 동료의 죽음까지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에 시달린다. 거칠고 능글맞은 듯하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 화사한 풀밭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하비에르를 연기하는 다른 배우는 차마 생각하기 힘들다. 올해 베를린영화제도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헌사했다.
마이클 더글러스 역시 야비한 여피족에 딱 들어맞는다. 딸의 마약중독을 알게 된 판사는 여전히 하나에 집착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돼.’ 그건 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결국 참회하지만, 그 참회마저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조차 탁월한 재능 덕분이다. 감독의 의도가 어쨌든 상관없이. 마이클 더글러스의 현 부인인 캐서린 제타 존스는 임신한 상태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겨우 붙잡은 부와 안락을 결코 놓치지 않기 위해 마약조직의 보스와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영국에서 할리우드로 건너온 캐서린 제타 존스의 야심을 읽을 수 있다.그 밖에 돈 치들, 데니스 퀘이드, 루이스 구즈만, 야콥 바르가스 등의 드라마틱한 연기도 일품이다. 특히 데니스 퀘이드의 악역 연기는 앞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