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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둠만을 잘라 먹지 않는다

연쇄살인마 대신 한국 사회를 겨냥한 <살인의 추억>

잘 알려졌듯,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5년간 10명의 부녀자들이 강간 살해당했고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었으나 공소시효가 끝난 2006년을 지나 오늘날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다. 2003년에 제작된 <살인의 추억>은 1986년을 시작으로 연쇄살인마의 행적과 정체를 쫓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확히 말해,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연쇄살인마를 제외한 당대 한국 사회의 다른 모든 것을 겨냥한 이야기다. 단순히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차원이 아니라, 끝내 범인의 자리를 공백으로 두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 이 영화에는 있다. 그 공백을 둘러싼 실패와 좌절과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영화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차단한 채, 더 깊은 어둠의 심연 앞에서 막을 내린다. ‘왜 그런 잔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나’ 하는 질문은 폐기되고, ‘왜 잡지 못했나’에 대한 무력한 반문만이 강력하게 남는다. 그러니까 <살인의 추억>은 질문의 방향이 범인이 아니라, 그를 제외한 나머지 우리를 향하게 만든다.

군부독재, 87항쟁 등 급변하던 시기에 발생한 화성 연쇄살인사건

왜 잡지 못했나. 현장 보존의 의미조차 모르는 형사들은 무능력하고 폭력적이다. 엉뚱한 주민을 용의자로 지목해서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면서도 자신들이 애초 잘못된 방향에서 추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특별히 악독해서라기보다는 사태의 구조를 파악하고 예견할 줄 아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전근대적이고 미개한 수사 방식 혹은 개별 형사의 능력이 표피적인 원인처럼 제시되지만, 그 원인은 장르의 서사적 장치에 더 가깝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보다 상위의 층위에 있다. 구체적인 개인 하나 구해내지 못하면서도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민방위훈련, 시위 진압 작전에 동원되느라 사건 현장에 투입되지 못하는 전경, 대통령의 지방 순시를 환영하기 위해 동원되는 소녀들의 이미지가 영화의 결정적 순간 사이에, 무심한 듯 그러나 날카롭게 삽입된다. 무엇보다 1986년, 부천경찰서의 여대생 성고문 사건에 대한 뉴스가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인물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사태를 더 깊은 미궁으로 빠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군부독재, 이념 공세, 고문 치사, 87항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던 시기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놓여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상위에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눈감기 어렵다. 영화 도처에서 유령처럼 출몰해 당대 현실을 환기하는 이 원인들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해 사건과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이 처참한 미결 사건의 비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폭력의 주체를 구체적인 범인 개인에게로 소급해서 설명하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선택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영화 도처에 원인들이 부유한다면, 도처에 징후들 또한 배회한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광호(박노식)는 형사가 들이민 용의자의 사진 앞에서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갑자기 어린 시절 화상을 입은 공포를 떠올린다. 그리고 철로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군홧발로 용의자들을 가차 없이 밟던 형사는 광호가 휘두른 각목의 못에 다리를 찔려 파상풍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할 위험에 처한다. 폭력을 행사하던 다리가 잘린 뒤 그는 영화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 형사들이나 관객에게 가장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던 박현수(박해일)는 백지처럼 창백한 얼굴로 늘 침묵 속에 혼자 있으며, 늘 무언가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건이 벌어지는 날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우울한 편지>라는 노래를 신청한 장본인이며, 범행이 벌어지던 시간 행적이 묘연했고, 생존한 희생자의 증언대로 부드러운 손을 가졌다. 그러나 유전자검사 결과 그는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다. 그가 개입된 이 이상한 우연의 일치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무언가에 골똘히 사로잡힌 이들의 시선과 얼굴 클로즈업은 의미화가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죽음과 기억, 불안과 공포의 징후가 이들 주위를 맴도는데, 그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즉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도처에 원인과 징후들이 넘실대지만, 이상하게도 둘 사이에 명징한 인과관계를 성립시키기에는 모호한 상황들이 여기 있다. 살인자를 찾고 말겠다는 형사들의 절박함이나 관객의 긴장감이 결국 허사로 끝날 때, 모든 것이 불분명한 가운데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살인의 추억>에는 그 어떤 인과론으로도 사건을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는 저항이 있다. 그리고 그 저항감은 망각을 거부하려는 의지와 냉소적인 무력감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더이상 형사가 아닌 2003년의 박두만(송강호)이 과거 시체를 발견했던 하수구를 들여다본다. 한때는 참혹한 피의 장소였으나, 지금 그곳은 더없이 고요하며 잡초만 무성하다. 오직 범인과 그 장소만이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2003년, <살인의 추억>이 제기한 질문은 슬프게도 2014년의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하다.

등화관제 시대의 ‘밝음’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 대한 인터뷰에서 “누가 나에게 ‘8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등화관제의 시대요’라고 말할 거다. 그건 인위적인 어둠을 만드는 행위다. (중략) 직설적 감정 표출이 우려되는 클라이맥스의 살인 장면(전경이 모두 시위 진압하러 갔다는 대사와 민방위훈련 장면과 여학생의 살해 장면이 노골적으로 교차되는 순간-필자)은 ‘거기 쌀집 불 꺼!’라는 방송과 함께 셔터가 내려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견 노스탤직한 장면으로 시작했고 관객을 그렇게 유도하지만, 내 진심을 폭발시키는 교차편집 과정에서 그 노스탤지어와 완전히 분리됐다고 생각한다. 그 지점에서 인물과의 거리감도 허물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절반만 동의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종종 놀라울 정도로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발언을 할 때가 있지만, 그의 세계가 우리의 넋을 빼놓는 순간은 그런 발언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얼룩들을 드러낼 때다. 즉 이상한 유머와 잔인한 아이러니와 균열로 세계가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줄 때다. 그가 기억하고 형상화하는 ‘등화관제의 시대’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밝음을 잠식한 인위적인 어둠이 아니라, 실은 밝음 그 자체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유혹함과 동시에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 건 한밤에 벌어진 사건의 폭력적 수위가 아니라, 대낮 환한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시체를 둘러싼 무지와 오인과 소동의 천진난만한 폭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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