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에서 살수(이범수) 일당은 바둑알을 보자기에 싸 철퇴처럼 휘두르고, 바둑에 진 태석(정우성)의 형(김명수)에게 바닥의 바둑알을 몽땅 삼키게 한다. 그저 고상하고 우아한, 한편으로는 지루하다고 생각되던 바둑에 원시적인 ‘촉각’을 느끼게 만든 장면이다. 장편데뷔작 <양아치어조>(2004) 이후 <뚝방전설>(2006), <퀵>(2011)에 이은 조범구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신의 한 수>는 바로 바둑을 소재로 한 액션누아르영화다. 물론 후자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장르의 컨벤션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안에 ‘인생’을 담으려 했다. 그것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전작에 대한 깊은 회한과 장차 만들고 싶은 영화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중이다. ‘순도 높은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는 조범구 감독을 만났다.
-전작 <퀵>이 손익분기점을 넘는 310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그 결과로 이번에는 좀 수월하게 작업에 들어간 편인가. =<퀵>은 생사를 걸고 만든 영화다. (웃음) 그래서 시사회에 은사님들을 초청하고 내 ‘유작’이라고까지 말씀드렸을 정도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전에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이효인 교수님께 ‘한국영화사’를 배웠다. 교수님은 내가 단국대에서 만든 <장마>(1996)가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탈 때 심사위원이기도 하셔서 나와 인연이 좀 있었다. 사실 시사회 같은 데 잘 오시지 않는 분인데, 전화해서는 “선생님, 아마도 제 유작일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뭔가 짠한 기분이 드셨는지 따님과 함께 오셨더라. (웃음)
-<퀵>을 유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뭔가. =다행히 <퀵>의 흥행으로 감독으로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퀵>이 내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에 후유증이 좀 오래갔다. 다른 작품 제의도 있었지만 1년 정도는 그 어떤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지냈다. 개봉 당시 ‘한국판 <택시> 혹은 <스피드>’라는 얘기를 꽤 들었는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성룡 영화도 많이 참조했다. 부끄럽지만 베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면서 내 개인의 감성이나 취향보다는 JK필름의 색채가 짙게 반영됐고, 영화의 코미디 장면은 JK필름 대표이기도 한 윤제균 감독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낯선 제작방식에 적응하느라 속이 많이 아팠다. 앞으로 감독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거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시나리오 완고가 나왔음에도 외부에는 내가 감독이라는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주요 배우들도 촬영 직전까지 감독이 누군지 몰랐다. 그런 이상한 구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충무로에서 윤제균 감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웃음)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물론 ‘반칙’을 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건 ‘내 영화’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순도 높은 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럼 <신의 한 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제작사 메이스엔터테인먼트에서 유성협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제작사 대표가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후배여서 다행히 오랜 공백 없이 제의가 들어온 거다. 다만 작가가 감독이 정해진 뒤 본격적으로 집필하겠다고 해서, 1년 정도 초고 단계부터 붙어서 함께 아이디어를 내며 만들었다. 이후 정우성이 캐스팅되고 7~8개월 준비한 뒤 크랭크인했으니, 시나리오 집필부터 개봉까지 2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그렇게 시나리오에도 내 의지가 많이 담겼고, 이후 사운드 믹싱까지 전권을 보장받으며 작업했으니, 100% 내 색깔을 담은 영화라고 자부한다. 오죽하면 사운드 믹싱 하는 분이 요즘 한국영화 중에 상위 0.1%의 영화라고 했을까. 투자사나 영화사 관계자가 작업실에 들러서 간섭하지 않은 이런 영화를 최근 보기 드물다면서. (웃음)
-바둑을 소재로 했지만 바둑을 모르고 봐도 무방한 영화로 완성됐다. 애초의 컨셉은 무엇이었나. =처음 미팅할 때, 투자배급사인 쇼박스 관계자들이 조심스레 “바둑 영화 아니죠?”라고 물었고 “네, 오락영화, 액션영화입니다”라고 답했다. (웃음) 목표는 단 하나였다. 반칙하지 않는 정통 상업오락영화. 바둑을 소재로 다루면서 풀어낼 수 있는 요소가 무궁무진하다고 봤다. 무엇보다 영화에 인생이 담겼으면 했다. <퀵>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아가 완전히 상실되는 경험까지 하다 보니 ‘앞으로는 상업영화를 만들더라도 최대한 삶의 무게를 담아보자, 적어도 공허한 영화는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신의 한 수>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캐릭터 하나하나에 공들이고 애정을 담고 싶었다.
-서사구조는 무협영화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복수를 꿈꾸는 주인공이 수련을 거쳐 고수가 되고, 이후 여러 다른 조력자를 만나 그 복수의 대상을 압박해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룬다. =단순하고도 힘 있게 히어로가 등장하는 무협지 느낌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태석에게 더 집중한 면이 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무술도 전혀 못하던 그가 조력자를 만나 변해간다. 그런 변화가 정우성이기에 어색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웃음) 그런 그를 중심으로 결국 사람 얘기를 하고 싶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처럼, 관객이 세상의 여러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으면 했다. 왕 사범(이도경)은 수세에 몰리다가 다시 유리해지니까 갑자기 담배를 좀 달라며 너스레를 떨고, 도박장에서 일하는 곱추(황춘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곱추로 위장해 납작 붙어다닌다. 옥상에서 모처럼 해후한 곱추와 꽁수(김인권)가 싸우는 모습은 반에서 애매하게 7, 8등 하는 애들이 마치 자기가 1등인 양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최대한 밝게 묘사하고 싶었다. 배꼽(이시영)과 마작을 두는 두 남자(권태원, 배성우)도 얼마나 행복해 보이나. 내기 바둑의 어두운 욕망과 태석의 복수를 다루는 이면으로, 마치 판타지처럼 인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고 싶었다.
-말 그대로 ‘정우성의, 정우성에 의한, 정우성을 위한’ 영화로 완성됐다. =실제로 마주한 정우성은 기가 엄청났다. 호랑이 같은 존재감이랄까. 그래서 흰색 슈트를 입고 나오는 장면에서는 마치 ‘백호’처럼 느껴진다. (웃음) 바둑판 위의 흰 돌을 상징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설정이었는데, 과연 그걸 정우성처럼 폼나게 소화할 배우가 또 있을까. 게다가 워낙 액션영화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라 동작이며 스피드가 남다르다. 살수와 싸울 때 온몸 여기저기 재빠르게 칼침을 놓는 장면이 있는데, 저속촬영을 한 게 아니라 실제 속도다. 워낙 빨라서 이범수가 당황할 정도였다. (웃음)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를 받았다. 밝게 가고자 했으니 15세 관람가를 욕심냈을 법하다. =나만이 아니라 작가도 제작자도 애초에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 시작했다. 투자배급사인 쇼박스가 <미스터 고> 이후 워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15세 관람가’ 제안을 꺼내긴 했지만, 결국 우리쪽 의견을 받아들여줬다. 처음부터 ‘청불’이 아니면 힘든 이야기인데 <신의 한 수>를 만들면서 괜히 자잘한 수는 두지 말자고 했다. (웃음) 밝게 가려고 했다는 말은 복수의 강도나 액션 묘사의 수위를 낮추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이를테면 주님(안성기)의 욕설을 거의 다 걷어냈고, 꽁수의 성적으로 조롱하는 대사도 대부분 삭제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초고에서 주님은 가짜 장님 행세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서로의 뒤통수를 때리며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구조로 가기 싫었던 거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불법 바둑장이 자리하고 있고, 종로구 관철동의 바둑꾼들 사이에 고수 주님이 있다. 말하자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일상의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 운운하며 천시하던 공간에 고수가 숨어 살고 있다. =의도한 바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내밀한 생명력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그런 공간을 한번쯤 더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리적인 동선에도 신경을 썼다. 태석이 한강을 건널 때는 노량진 수산시장과 가장 가까운 한강대교를 걷는다. 코앞이 노량진 수산시장인데 한남대교나 성산대교를 건너면 거짓말이 되니까. (웃음)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와 비교하는 시선이 많다. 일단 꽁수는 명백하게 <타짜>의 고광렬(유해진)을 연상시키지만, 정 마담(김혜수) 같은 팜므파탈과 ‘내부의 적’이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겨진다. =기획단계부터 당연히 나온 얘기다. 여러 명이 팀플레이를 펼치고 매 챕터를 소제목으로 시작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신의 한 수>는 문창과 출신답게(웃음) 착수, 포석, 행마, 사활, 계가 등의 소제목을 마치 한편의 꽉 짜인 소설의 흐름처럼, 그러니까 이야기 전체를 ‘바둑 한판’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태석의 거대한 복수극이다. 반면 <타짜>는 고니(조승우)의 복수극이 일찌감치 끝나고 정 마담을 만난 이후 펼쳐지는 또 다른 인생유전의 이야기다. <타짜>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신경 쓰면서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타짜>에서 평경장(백윤식)의 “화투는 슬픈 드라마”라는 대사는, 사실 1960년대 일본 바둑을 평정하며 일명 ‘면도날’로 불렸던 사카다 에이오 9단이 했던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는 말을 바꾼 것이다. 오히려 <타짜>가 바둑에서 먼저 훔쳐갔다고도 할 수 있다. (웃음)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는 말은 너무나 멋진 표현이라 사실 초고에 있었던 대사다. 그런데 <타짜>에서 이미 써서 못 쓴 게 맞다. (웃음) 그래도 ‘바둑’과 ‘인생’을 한 데 아우를 수 있는 또 다른 말을 꼭 쓰고 싶었다. 그래서 조훈현의 스승이기도 한 후지사와 슈코가 “바둑의 신(神)과 둬서 이기려면 당신은 몇점을 깔겠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둔다면 넉점을 깔겠다”고 했던 얘기를 응용했다. 그 질문을 살리고 대답만 변형해서 보통 바둑인들 사이에서는 ‘명예를 건다면 석점, 목숨을 건다면 넉점’이라고들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 말을 인용하며 각각 두점과 석점으로 바꿨다. 한점을 줄여서 좀더 타이트하게 간 거다. (웃음)
-“화투는 테크닉으로 하지만 바둑은 대가리로 하는 거거든”이라는 왕 사범의 대사도 재밌다. 마치 복수하는 태석처럼, 감독도 멋진 대사를 뺏어간 <타짜>에 복수하는 느낌이다. (웃음) =이어서 “바둑은 대가리야 대가리, 대갈통!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진리야” 하는 왕 사범의 대사는 배우 이도경의 맛깔나는 말투로 더 빛난다. 남을 속고 속이는 기술과 뒤틀린 욕망이 난무하는 그 내기 바둑판에서 세상의 진리를 논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나. 물론 그것도 다 인생이다. (웃음)
-대사 얘기가 나온 김에, 혹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다면. =“세상이 고수에겐 놀이터요, 하수에겐 생지옥 아닌가”라는 주님의 대사다. 내게는 <퀵> 이후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낸 3년간이 생지옥이었다. 감독으로서 남의 영화 베껴서 만들었다는 자괴감에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다. 이미 유작을 만들었으니 무서울 게 없다고. (웃음)
-마지막은 분명히 속편을 암시하는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당연히 속편을 만들고 싶다. (웃음) 새로운 공간으로 가서 새로운 캐릭터들과 만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주님이 얘기한 ‘귀수’가 누구인지 찾는 과정도 나올 것이고, 어린 량량(안서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정우성도 처음부터 시리즈로 가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안성기와 정우성의 팀플레이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배우의 만남이었다면, 또 다른 레전드가 가세할 때 더욱 폭발력이 생겨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번 첫 번째 이야기가 만족할 만한 흥행을 거뒀을 때 가능한 일이다. (웃음)
내내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한 조범구 감독은 “이제 해피엔딩에 끌린다”고 했다. 새삼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최근의 여러 일을 겪으며 “세상에 우울한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어차피 사람들이 복수극을 보는 이유는 통쾌함을 느끼고 싶어서니까, 죽는 사람보다는 사는 사람이 더 많고, 돈 없던 사람한테는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이왕이면 아주 많이”) 돈이 왕창 생기고, 어차피 나올 인물들을 이왕이면 지질하기보다 최대한 멋지게 그리고 싶었단다. <신의 한 수>를 밝게 그리고 싶었다는 애초의 의도는 바로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