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인디포럼 영화제에서 고맙게도, 1990년대 필름영화를 회고하는 16mm 필름 특별전을 열었다. 그리고 더욱 고맙게도 필름영화 목록에는, 설화처럼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적 영화가 몇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파업전야>(1990)! -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영화창작집단 ‘장산곶매’의 그 전설적 작품, 실제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직접 그들과 함께 촬영했으며, 정부로부터 먹은 상영금지처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대학가에서 순회 상영이 이어졌으며, 상영 시에는 이를 저지하려는 전경과 상영을 사수하려는 전투조 간의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던, 하지만 그 난리통 속에서도 전국 30만 관객을 동원했다던 바로 그 전설의 작품! 물론 나도 이 영화를 안 본 건 아니나, 비디오로 돌려보던 그 초라함을, 감히 16mm 필름이 투영되는 스크린에 비하랴. 얼른 달려가서 보리라.
결론은 명불허전! <파업전야>는 당시 87년 혁명의 기운을 고스란히 뿜으며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레전드는 레전드인 이유가 다 있었으니, <파업전야>는 요즘 영화처럼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비유와 상징 속에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의기투합한다는 이야기를 상업적으로 말랑말랑하게 꾸미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대중을 의식화하고 노동해방을 고무시킬 수 있다면 온갖 클리셰와 전형적 캐릭터들을 끌고 와서 대놓고 선동질을 서슴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전형성은 흠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가 된다. 부당한 대우에 대항해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주변의 제안,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갈등하는 주인공! 그의 내면적 갈등에 불을 지르는 여자친구의 파업 참여! 오오오,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 결국 자신이 외면한 동지들이 용역깡패들에게 끌려나갈 때, 기계를 멈추고 멍키스패너를 하늘 높이 치켜드는 주인공의 마지막 결단이여! 오오오오, 노동해방 만세. 너무 전형적이고 올드해서 민망하지 않았느냐고? 전혀. 난 헤드뱅잉을 했다. 뻔뻔한 선동질이 낯간지럽지 않았느냐고? 전혀. 이 영화는 낯을 간질이기는커녕, 낯을 후려친다. 내가 이 영화에 이렇게 선동당한(?) 이유는 간단한 것 같다. 이 영화, <파업전야>는 조직에 대한 절박한 갈망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난 그 전제를-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 동안만큼은-받아들였을 뿐이다. 이 영화가 그려내려는 노동조합도 조직이고, 이 영화가 대중에게 하려는 의식화도 조직화다. 게다가 제작진도 감독과 노동자의 벽을 허문 공동체로 스스로 조직화했다. 이 영화는 조직을 꿈꾼다. 조직의, 조직에 의한, 조직을 위한 영화.
너네 선동당하고 있지?
물론 요즘은 이런 영화가 나오기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리버럴하게 생각하고, 리버럴하게 행동하면서, ‘조직에 저항하자’는 슬로건조차 패션으로 삼는 힙스터들이 득세했기 때문만은, 그리고 그들의 입맛과 기호에 맞추어 리버럴 문화자본이 멀티플렉스 벌집을 공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 그가 힙스터건 꼰대건- 한국 대중의 의식 한구석에선,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조직혐오증’이 담당하는 몫이 큰 까닭이다. 누군가 왜 우리가 조직을 혐오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두서없이, 87 항쟁 이후 민중세력의 쇠퇴, 합당과 철새정치로 점철된 의회정치, 정부뿐만 아니라 야당을 포함한 거대 조직에 대한 배신감, 나아가 기득권과 시민사회의 분리 같은 쓰라린 예들을 떠들어대야 할까. 그러다 보니 시스템을 독점하는 소수 특권층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럽게 한국인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그리고 이 소수 특권층에 대한 반발로 덩달아 (그들이 독점 운영하는) 조직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고 넘겨짚어봐야 할까. 봉준호 감독의 옛날옛적 작품인 <괴물>을 예로 들어야 할까. 정부, 한국군, 미군 같은 거대 조직이 합심한 것처럼 괴물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도리어 자기 잇속만 채우려고 하니, 민초들이 나서서 괴물을 잡으러 간다는 그 내러티브를? 지금도 기억하는 기막힌 하나의 몸짓. <괴물>의 마지막 부분, 아버지는 괴물에 대해서 여전히 헛소리를 떠들어대는 TV의 전원을, 발로 끈다. 손도 아니고. 발로. 당신이 순수한 민초라면 이제는 손도 대기 싫은 그것, 그게 바로 (미디어, 정부, 군사 같은) 조직이 된 셈이다.
사실 극장까지 갈 것도 없을 것이다. 조직혐오증은 극장 밖의 극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 않나. 아마도 본격적인 상영은 촛불집회 때였던 것 같다.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에 격분한 군중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자, 거대 조직(물론 여당과 정부)은 그들을 문초했다. ‘배후가 누구냐?’ 촛불 세력의 대답은 명확했다. ‘배후란 없다’ 거대 조직이 민초들에게서 찾아내려는 바로 그 더럽고 불순한 요소, 그리고 반대로 민초들이 철저하게 그 부재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그 더럽고 불순한 요소, 그게 바로 ‘조직’인 게다. 당신이 누구 편을 들건, ‘조직은 더럽고, 자발성은 깨끗하다’는 정식은- 어느 편에서도 공평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인 셈이다. 얼마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시에도, 더딘 구조작업을 규탄하는 희생자 가족이나, 희생자를 추모하려고 모인 학생들에게 거대 조직이 던진 말은 ‘너네 선동당하고 있지?’였다.
조직혐오증은, 조직이 선동하는 조직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혐오증은 선동혐오증이다. 우리가 선동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래, 우린 속아만 살았다. 힘들 때마다 돈 퍼주고 몸도 주고 마음도 주었지만, 결국은 이용당한 채 빈털터리로 버려지는 삶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관건은, 조직에 대한 희망을 그래도 부여잡느냐, 아니면 조직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느냐였을 게다. 장산곶매, 그리고 당시의 노동영화들은 분명히 전자를 택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영화들은 분명히 후자를 택했다. <모비딕> <또 하나의 약속> <더 테러 라이브> 같은 용감한- 그래서 더더욱 소중한- 영화들을 제외하면(두서없이 나열해보는 거라 누락된 영화들에 관련해서는 양해 말씀…), 정부나 기업 등 거대 조직은 그저 (시나리오상 손쉬운) 악역 역할을 맡거나, 아니면 누아르영화나 스릴러영화에서처럼 조직폭력배나 수사 조직 등의 은유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영화도, 조직을 처리하는 법에 있어서는, 대중의 의식 깊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조직혐오증과의 타협점을 찾기 시작한 게다. 혹자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변호인> 같은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한국형 히어로물(?)에 대해서, 관변 조직을 전격적으로 다루니 조직혐오증이 누그러지는 귀중한 예가 아니겠는가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그 반대다. 최근의 한국형 히어로물이 관변 히어로를 다루는 이유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부패한 거대 조직을 그 내부에서부터 바꿔보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관변 히어로야말로 조직혐오증을 전제하고, 또 그를 이용하는 영화 형식이다. 모 컴필레이션 앨범 제목처럼, ‘호걸을 건드리면 관아는 잿더미가 된다’.
혐오하면서 동시에 갈망하는
아아, 벌써부터 들려온다. 필자를 비난하는 가상의 목소리들이. 조직을 찬양하는 놈이냐며, 파쇼 아니냐며. 운이 나쁘다면, 북조선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괴뢰각시 아니냐며. 운이 조금 좋다면, 조직화가 가진 오류를 시대착오적으로 반복하려는 조합주의자 내지 교조주의자 아니냐며. 하지만 그렇지 않사옵니다. 소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조직이 좋다 나쁘다, 조직혐오증이 필요하다 필요 없다, 뭐 이딴 식의 똑 부러지는 얘기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세월이 그리 변했고, 영화도 그리 변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그때는 장산곶매와 <파업전야>가 편집증적으로 절실했던 것만큼, 지금은 장산곶매와 <파업전야>에 히스테리 반응하는 것만큼, 우리의 조직혐오증 안에는, 새로운 조직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만큼, 더욱 정교하게 새로운 그런 조직. 우리가 조직을 욕하는 만큼, 원하는 그런 조직. 난 이에 대한 예를 들진 못하겠다. 나에겐 그런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사실 누구에게도 없다, 조직은 언제나 집단적 상상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그 냄새 정도는 맡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아무리 고귀한 영화도, 아무리 후진 영화도 그걸 할 수 있다. 위에 언급했고, 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영화들도 이미 그걸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집단적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인디포럼 필름기획전에선 <파업전야>와 함께 <둘하나 섹스>(감독 이지상)도 상영했다.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이 영화엔, <파업전야>와는 정반대의 힘, 즉 어떠한 틀과 속박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절대 자유를 갈구하는 개인적 몸부림이, 정말이지 지랄맞게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다. 그 개인적 절실함 속에서도, 냄새가 난다. 새로운 조직을 죽더라도 염원하는 냄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