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노동자로 여러 해 일하다보니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표적으로 “선생님이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성차별” 그리고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다. 전자는 낙태, 후자는 서울중심주의라고 대답한다(집중은 절대악!). 평소 나름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지체없이 말하는데 대개 의외라는 표정이다.
낙태와 성폭력은 당사자가 아니면 여성도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사람들은 그 메커니즘 자체를 전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 낙태와 동성애는 대통령 선거를 좌우해온 오랜 이슈다. 범공화당 반대 세력은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선택권(pro choice, ‘낙태할 권리’)을 주장하지만, 우리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에서 낙태는 선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심각한 공중 보건 문제다. 선택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낙태는 사후 피임, ‘여자의 숙명’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피임법(먹는 피임약)은 남성의 피임법(콘돔 사용)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고 건강에 좋지 않다. 피임은 공동 책임이지만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요구할 만한 협상력이 있는 여성도 드물고, 그런 여성을 수용하는 남성은 더 희귀하다.
낙태의 고통에 더하여 또 다른 낙태의 현실이 있다. 파혼했던 남성, 이혼 소송 중인 남성, 임신 사실도 몰랐던 남성, 양육의 의지도 능력도 없는 남성이 단지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임신 중절로 고소하는 경우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을 제외한 임신 중절은 형식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법질서와 사회규범, 모든 것이 자기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성이 축구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국가대항이라는 집단 정체성 강화다. 때문에 축구는 남성 중심적인 섹스를 은유한다. 골인(goal ‘in’)은 사정이다. 이를 막기 위해 수비수와 골키퍼가 동분서주한다. 실점은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내 여자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자책골을 넣은 선수나 골키퍼가 살해 위협 수준의 비난을 받는 것도 이때문이다.
낙태에 대한 사회의 낙인은 생명의 소중함과 전혀 관련이 없다. 피임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는 사고, 임신을 고백하는 파트너가 귀찮은 경우, 문란한 여성론, 아예 피임이 뭔지도 모르는 남성들…. 이들의 관심사는 골인밖에 없다.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앨런은 말한다. 그릇으로서 여성의 몸(예를 들어, 子宮)과 그릇에 담긴 것은 모두 내 것(남성)인데, 낙태는 주인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행위라는 것이다. 골이 들어갔다가 그물 밖으로 나와버렸을 때의 분노!
낙태를 경험한 여성은 인간관계와 사회구조의 이중적 피해자이며 가장 목소리가 없는 집단이다. 몸에 대한 인식은 사회 자체다. 화제의 독립영화, 조세영 감독의 <자, 이제 댄스타임>(2013)을 보라. 골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