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작가 A씨는 투자사의 잦은 시나리오 수정 요구에 지쳤다. 하지만 하소연할 데가 없다. 기획/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시나리오 수정 횟수를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자사도 불만이 있다. 최종 시나리오가 나와야 투자심사에 보낼 수 있고, 캐스팅 전략을 짤 수 있는데 A씨가 수정한 시나리오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다. 기획/개발비를 지급했으니 최종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A씨에게 계속 수정 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 창작자와 투자자는 승자 없는 줄다리기를 계속 해야만 할까.
6월26일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터에서 ‘기획/개발 표준계약서 영화인 공청회’가 열렸다. 이날 공개된 기획/개발 표준계약서는 기획/개발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만 제시되어 있을 뿐 세부 공정을 나누는 기준과 내용이 없었던 기존 계약서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기획/개발 표준계약서는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투자사의 투자를 존중하는 조항이 골고루 반영됐다. 기획/개발 단계를 세분화하고, 기획/개발이 중단됐을 때 피해를 방지하는 장치도 마련됐다. 투자사가 투자를 우선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사전에 설정하도록 했고, 투자 여부를 의무적으로 제작사에 통지하도록 했다. 달라진 표준계약서에 따르면, 창작자와 투자자는 최종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까지 몇번을 수정할 건지 명확하게 명시해야 하고 이에 따라야 한다.
기획/개발 표준계약서 개발에 참여한 장안대학교 연기영상과 정재승 겸임교수는 “투자자와 창작자 모두 존중할 수 있는 계약서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프로젝트마다 규모, 예산 등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 표준계약서가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이걸 가이드 삼아 현장에 두루 활용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영화인들은 “창작자의 명분과 투자자의 실리를 모두 충족시키는 내용이 들어갔다”는 반응이다.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창작자는 투자를 받았으니 약속한 날짜까지 책임감 있게 작업하면 되고, 투자자는 안전하게 투자를 할 수 있게 됐다”고 기대했다.